효녀 가수 금잔디의 어머니 전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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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해 노래한 지난 23년 그리고 내가 비혼주의인 이유”
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
“어려서부터 노래를 부르면서 지금의 삶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는 직업이잖아요. 그것으로도 충분하고 충만하다고 느껴요. 누구 한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게 어느 순간 부담으로 다가왔죠.”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녀는 사랑이 인생이 전부였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누구보다 뜨거웠었다.
“소위 말해 ‘금사빠’였어요. 화르르 불타올랐죠. 돌이켜보면 그런 연애의 끝이었던 이별은 늘 아팠습니다. 늘 눈물이었죠.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와 같은 노래 가사가 딱 저의 심경을 그린 것 같아요.”
금잔디는 과거 자신의 연애를 두고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별을 통보하는 과정에서도 힘들었고, 이별을 통보받은 후에는 더 힘들었다. 그렇게 금잔디에게 사랑은 사치가 됐다.
“몇 번의 이별 끝에 내린 결론이 있어요. 상처를 회복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 다짐했죠. 지금은 연애할 시간도 부족해요.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의 저는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거든요.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나눌 여유도 없고 에너지도 없네요.”
금잔디는 팬으로부터 받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통해 성장해왔다. 팬이 건네는 위로와 조언, 애정은 그녀가 일하는 원동력이었고, 노래하는 이유였다.
“제가 받은 사랑이 더 큰데도 되레 저한테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에요. 제 노래와 목소리를 좋아해주시고,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서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남녀 간의 사랑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사랑받는 가수로 살아가는 게 저한테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라버니’, ‘일편단심’, ‘사랑껌’…. 그녀가 낳은 히트곡들은 사랑이 아닌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데뷔 20주년을 맞아 기념 앨범 <Remember>를 발매했다. 타이틀곡 ‘당신은 명작’은 공개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금잔디가 금잔디한 셈이다. 이렇듯 금잔디에게 노래는 인생 그 자체였다.
“코로나19 여파로 힘들 때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히트곡이 있다는 거였어요. 감사했죠. ‘내 인생은 성공한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어요. 만약 내가 그동안 연애하느라, 사랑하느라, 이별하느라 노래를 소홀히 했다면 히트곡이 있었겠어요? 아마 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는 말이요.
저는 그 통념을 깨버리고 싶었어요.
남편 복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만큼은 복덩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엄마에게 무조건 자랑스러운 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고,
그걸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쌍한 우리 엄마…”
“트로트를 태교 음악으로 들으셨다니까 제 인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트로트인 셈이네요. 트로트의 가사가 곧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가수의 꿈을 키우지도 못했을 테고, 엄마의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걸어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금잔디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악화됐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성공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자식 때문에 이혼도 못 하겠다 말하는 엄마가 불쌍했어요. 이유도 모른 채 아빠한테 당하는 엄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아빠랑 헤어지라고 말하는 저에게 엄마는 제 인생에 흠이 될 걸 걱정하셨죠. 온전히 자식 때문에 살아주는 엄마가 속상했고 미안했고 고마웠습니다.”
금잔디는 자신의 엄마를 쏙 빼닮았다. 여리고, 강하고, 무엇보다 미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분신이었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분이었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는 말이요. 저는 그 통념을 깨버리고 싶었어요. 남편 복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만큼은 복덩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엄마에게 무조건 자랑스러운 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고, 그걸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 같아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다니던 택시 회사가 잘됐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 몰래 택시를 팔고 사업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빠 때문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버지를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빠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늘 사고만 치는 존재라고 여겼어요.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알지 못했죠. 어머니보다 두 살 어려서 철없이 굴었던 건데, 저는 그런 아빠가 가부장적이고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빠만 잘못된 건 아니었다는 걸 느껴요.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을 거고, 엄마와 아빠의 성향이 달랐던 건데 저는 늘 엄마 편이었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죄송해요.”
그녀는 지금껏 어머니를 위해 노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딸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어머니가 이제는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엄마가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제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웠으면 좋겠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즐거운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엄마는 자식 걱정 없이 즐기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수학의 정석>을 네 번이나 풀었을 정도로 수학을 좋아했던 학창 시절의 금잔디는 당연히 수학 선생님이 되는 줄 알았다. 노래가 좋고 무대가 좋지만 수학 선생님이 돼 집안 경제에 도움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과목은 그다지 잘하지 못했었는데 수학만큼은 늘 100점이었어요. 정답을 도출해나가는 그 과정이 흥미로웠고, 정답을 맞히고 나면 짜릿했죠.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하고 오니까 엄마가 저더러 수학 선생님을 하라더군요. 그땐 그게 제 인생의 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트로트 가수가 됐죠.”
그래서일까? 금잔디는 지금도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건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그녀다.
“모든 면에서 과정이 정말 중요해요. 조금 부족하더라도 과정에서 열심히 했다고 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죠. 수학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금잔디가 성인이 돼서도 똑같은 거죠. 제가 원하는 전공에서 떨어져 재수를 했고, 결과적으로는 대학교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습니다.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해버리고 마는 성향인 것 같아요.”
귀엽고 앙증맞았던 소녀 금잔디는 무대를 즐겼다. 그녀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게 된 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금잔디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좋았고, 그래서 늘 노래를 불렀고, 당연히 인기가 많았다.
“학창 시절 내내 연예부장을 했었어요. 친구들 앞에서 노래하는 게 좋았고, 분위기를 띄우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공부보다는 노는 게 더 좋았던 학생이었죠. 그래선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온 동네방네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어느 날부턴가는 제 책상 위 팬레터가 쌓이기 시작했죠.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았었나 봐요.”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던 무기였다. 가난해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그녀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게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놀러 가면 늘 제 주변엔 사람이 많았어요. 집에 가면 매일 싸우는 엄마랑 아빠가 있지만 밖에 나오면 저를 인정해주고 박수 쳐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힘들고 지쳤던 학창 시절에 위축되지 않고 열심히 학교 다닐 수 있게 해준 게 노래였고 목소리였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놀러 가면 늘 제 주변엔 사람이 많았어요.
집에 가면 매일 싸우는 엄마랑 아빠가 있지만
밖에 나오면 저를 인정해주고 박수 쳐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힘들고 지쳤던 학창 시절에 위축되지 않고
열심히 학교 다닐 수 있게 해준 게 노래였어요.
“우럭이나 광어처럼 살아!”
“운동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제가 왜 그렇게 운동에 목을 맸을까 싶어요. 올해 들어서는 운동도 안 했어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왔던 저에게 ‘쉬어 가자’라고 되뇌었죠. 살면서 처음으로 계획이라는 것도 해봤어요. 하루하루가 미션이었고, 그래서 매사에 즉흥적이었던 제가 목표를 정해두고 계획을 짠 거죠.”
매일 주어지는 미션을 클리어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보니 쳇바퀴 같았던 인생이 롤러코스터가 됐다.
“1년에 지구 네 바퀴 반을 돌았어요. 그래서 항상 내일 스케줄이 걱정이었죠. ‘준비해야지’, ‘멘트 짜야지’, ‘팩 붙이고 자야지’ 이런 것만 생각했어요. 스케줄이 있으면 사흘 전부터 잠도 못 잤어요. 걱정, 긴장, 두려움… 이런 복합적인 감정 때문에 수면제 없이는 밤을 보내는 게 너무 힘들었죠.”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딱 맞았다. 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가 고통받을 때 금잔디는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었다. 비우는 연습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고, 비로소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트로트 후배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저도 선배가 됐죠. 제가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면 후배들이 보기에 얼마나 안 좋겠어요. 그래서 노력하기 시작했고, 불과 몇 달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죠.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가 저를 끌고 다녔다면, 지금은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제야 나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방송을 통해 만난 지인으로부터 의외의 조언을 들은 후부터였다. 인생을 대하는 금잔디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이다.
“방송을 통해 만난 지인과 골프 모임에 갔어요.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그분은 소위 ‘날라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아무런 규칙도 없이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외의 모습이 많아요. 되는 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에게 ‘내일이 걱정이고, 모레가 걱정이다’라고 털어놓았죠.”
금잔디의 고민에 돌아온 지인의 답변이 기가 막히다. “우럭이나 광어처럼 살아.” 백조처럼 우아하게 보이려고 물 밑에서 발버둥치는 것보다, 수면 밑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세상이 궁금할 때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살피는 삶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어요. 왜 나는 그동안 1인자가 되기 위해 물 밑에서 발버둥쳤을까 싶은 생각에 억울하더라고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백조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죠. 우럭이나 광어처럼 살라는 말에 느껴지는 바가 많았어요.”
지인의 말이 마음에 와닿아 어떤 전율을 일으켰다.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다.
“며칠 뒤에 있을 공연을 걱정하느라 잠 한숨 못 자는 저에게 ‘아무리 걱정해도 무대에 올라가면 잘하게 돼 있어’라고 말해주었죠. 그 말이 어찌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던지요. 이제는 공연 전날에도 잘 잘 수 있어죠.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이 없어지면서 공황장애가 왔을 법도 한데 그분의 조언 덕분에 큰 위기 없이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인은 단 한 번도 자유롭게 살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했다. 조금만 자신을 내려놓으면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금잔디는 그 지인을 두고 ‘최초의 멘토’라고 말했다.
“그분의 인생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자신이 만든 안무를 다른 가수가 도용해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피눈물을 삼켰을 거예요. 자신을 둘러싼 각종 논란과 의혹도 힘들었을 테고요. 하지만 그동안의 시간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누구보다 단단하고 지혜롭죠.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장깨기와 같았던 그녀의 인생이 2막을 맞았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이렇게 변했냐’고 묻는다.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여유다.
“스스로를 속박하고 굴레 안에 가두었던 저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지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반경에서 변화를 일으켜주었죠.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변한 것 같다’고 말해요.”
금잔디는 종종 가까운 절을 찾아 기도하고 번뇌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할머니가 스님이셨어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절에 다니게 됐죠. 절 특유의 분위기가 좋아요.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도하고 나면 차분해지죠. 힘들 때마다 절을 찾곤 했었는데, 요즘엔 힘들지 않은 날에도 종종 갑니다.”
금잔디는 모든 말에 진심을 눌러 담았다. 차분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금잔디는 금잔디다.
“저를 둘러싼 오해가 많아요. ‘강할 것이다’, ‘애교가 많을 것이다’ 등 다양한 추측을 하시죠. 그러나 저는 저일 뿐이에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죠. 애교가 있기도 하지만 없을 때도 있어요. 있는 그대로의 저를 편견 없이 봐주셨으면 해요. 금잔디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금잔디입니다.”
에디터 : 하은정 | 취재 : 이예지(프리랜서) | 사진 : 하지영 | 스타일리스트 : 박희경 | 헤어 : 이호진 | 메이크업 : 허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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