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조연’ 그 배역이 나에겐 ‘명품 주연’…데뷔 20년 배우 정희태

남지은 2023. 5.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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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쉼톡]

지난 20년간 맡는 역할마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작품을 빛낸 배우 정희태.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과정에 최선을 다하려는 그의 인생 철학이 눈에 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는 거의 매일 계단을 오른다. “집 근처 산책로에 총 300~400층 정도 계단이 있는데 퇴근길에 거길 먼저 들러요. 그리고 집에 와서도 또 계단을 이용해요.” 성에 안 차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가 계단 오르기를 반복한다는데 지치지는 않을까. “얼마나 왔는지 등을 자꾸 생각하면 끝이 보일수록 힘들어져요. 계단 오르는 그 자체에 즐거워하며 오르다 보면 어느새 목표점에 도달해 있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도 없는 일. 행동과 말에서 이 사람의 인생철학이 보인다. 과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배우 정희태다.

그는 지난 20년 연기 생활도 계단 오르는 마음으로 내디뎌 많은 이들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2002년 영화 <해안선>에서 ‘대원7’로 출발해 2014년 드라마 <미생>(tvN) ‘정희석 과장’을 지나, 지난해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 ‘이항재 비서실장’에 이르렀다. 데뷔 20년 끝자락에서 만난 이항재는 배우 정희태의 연기력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진양철 회장’(이성민)을 보필하는 묵직한 배역으로 극의 중심을 잡고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데뷔 때부터 더디더라도 꾸준히 즐기면서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시청자들이 그 부분을 알아준 것 같다”고 말했다.

꾸준히 한다고 뭐든 이룰 수 있다면 ‘좌절감’이란 단어는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특히 연기는 버틴다고 이길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 않나. 그는 “‘과정을 즐기라’는 말은 ‘그저 잘 지내라’는 뜻만은 아니다.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또 다른 과정에서 바꿔나가야 할 단점들이 보인다. 이를 보완하면서 과정을 쭉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상상하지 못한 기회와 결과가 찾아올 거라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희태의 강렬한 눈빛은 이 말을 할 때 유독 빛났다.

그는 그런 경험을 이미 했다. 그는 2008년 아침드라마 <하얀 거짓말>(MBC)에서 ‘안 비서’ 역으로 먼저 눈에 띄었다. 대사가 주로 “네”였는데, 단순한 한마디를 상황에 맞게 애증, 권태, 연민 등의 감정을 담아 표현한 것이 화제였다. “전 그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비서는 정서적으로 회장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주어진 상황에 맞춰 변화를 줘야 상대의 감정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완성도가 높아질 것 같았습니다.” ‘안 비서’부터 시작한 고민이 이후 여러 비서를 거쳐 ‘이항재 비서’에 이른 것이다. “이항재는 드러내지 않는 진양철 회장의 속마음을 미리 파악하고 행동해야 했어요. 그래서 함께 지내온 세월과 그의 아픔을 이해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했죠.” 그래서 표정은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눈빛 등으로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런 노력이 스스로 역할을 키웠다. 제작진이 생각한 것 이상의 것을 해내니 여러 작품에서 분량이 갈수록 늘었다. 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에서는 같은 민족을 고문하는 경무사(대한제국 때 경무청의 장으로 오늘날 경찰청장) 배역으로 애초 3~4회 분량이었는데 후반에도 등장했고, 2010년 <전우>(KBS1) 때도 등장인물에 짧게 소개된 북한군 역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사연이 이후 드라마에 가득 펼쳐졌다.

연극배우 출신인 정희태는 2002년부터 지금껏 90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분량 관계없이 늘 고민하며 역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중 몇편을 골랐다. 각 방송사 제공

정희태는 연기 칭찬을 굉장히 쑥스러워했다. “몸 둘 바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짜 부족하다고 느껴서….”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 채찍질해 온 것이 과정을 좋은 결과로 이끈 듯했다. <재벌집 막내아들> 촬영 전에는 연기가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에 연기 워크숍도 시작했다고 한다. “흔히 연기 방법이라고 하잖아요. 테크닉을 응용해서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연기하는 걸 실현해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슬프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대상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대상을 보면 저절로 감정이 생기게 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효과를 본 걸까. 그는 진양철 회장과 이항재 비서 이야기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진양철 회장을 생각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지만 정희태가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는 “연기를 전공하지 않아 혼자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웠다. 그동안 표현을 더 자연스럽게 하는 게 숙제였다”며 듣는 사람 반성하게 하는 말을 계속했다. 정희태는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신방과에서도 연기를 배우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진로를 선택할 때 혹시 내가 연기를 못 하더라도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자 싶었죠. 신방과에 왔더니 다들 다른 공부를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결과적으로는 그런 게 다 운명 아닐까. 대학 1학년 때 선배의 권유로 동아리 연극부 작품에 배우로 캐스팅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2등이면 어떠냐, 이래도 저래도 다 괜찮다”던 인생관도 그러면서 바뀌었다. “연기 밑천이 없다 보니 언젠가부터 잘하는 사람들한테 질투가 나고 나도 잘하고 싶은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연기가 나한테 이런 에너지를 주는구나 싶던 차에 군대에 다녀왔어요. 언론 관련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선배 권유로 다시 연극을 하면서 몸속 세포들이 본격적으로 꿈틀댔죠.”

연기를 못 할 줄 알았는데 하게 됐고 오랫동안 묵묵히 걸어오며 인정받는 배우가 됐다. 그래서일까, 그는 <재벌집 막내아들> 이후 쏟아진 호평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작품 좀 고르면서 ‘이름값’ 올려도 될 것 같은데 이후 작품은 지난 2월 종영한 <트롤리>(SBS)였다. 딱 한 회 등장했다. 스스로 생활형 배우라고 생각하는 걸까? “네 전 그래요. 절 특별한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들어오는 작품에 감사하려고 해요. 그러나 못 하게 되는 건 정중하게 거절하죠. 예전에 작품이 없어서 힘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나를 찾아주는 이들이 고마워요. 그런 세월이 저를 들뜨지 않고 오직 연기만 볼 수 있도록 단단하게 만든 것 같아요.”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 역시 결과만 보는 사회에 상처도 받았다. 그래서 ‘명품 조연’이 아니라 ‘명품 주연’이 되길 바랄 때도 있다.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러나 욕심내지 않는다. “‘명품 주연’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단단해져야 할 게 많아요. 주연이 주는 무게감, 부담감이 상당하니까요. 제가 그걸 견딜 수 있는 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번은 해보고 싶다 정도이지 굳이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싶진 않아요.” 요즘은 조연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달라지고 그 위상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 변화를 체감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주연의 최대치가 보이게 조용히 물러나 있어야 하는 역할이었다면 요즘은 오히려 극을 풍성하게 해줘요. <재벌집 막내아들>만 봐도 진양철 회장과 함께 보낸 세월 등 서사가 담겨 있잖아요. 이항재가 살아왔을 인생을 시청자들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들이 녹아 있죠. 역할에는 주연과 조연이 있지만, 이항재라는 인물만 보면 그는 주인공이죠.”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아도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한 정희태 같은 배우들이 이런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또 노력하는 과정을 지나는 중이다. 그는 더 다양한 인물을 풍성하게 표현하고 싶어 “1년에 한 편 연극이나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를 목표로 삼고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 촬영 이후 연극 <가면산장 살인사건>에 출연했고, 6월28일부터 새 연극 <테베랜드>(서울 충무아트센터) 무대에 선다. 그런데 대본을 받고 “기함을 했다”고 한다. “2인극인데 대화하면서 하는 대사들이 너무 철학적인 거죠. 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번 연극이 너무 어려워요.” 그는 고민하는 과정에서 또 답을 찾을 것이다. “새로운 정희태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니 최선을 다해 노력해봐야죠. 과정이 좋은 결과로 나오면 좋겠네요.”

좋은 결과를 내려면 과정이 중요하다는 얘기로 다시 돌아간다. 그는 과거의 그처럼 더디지만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을 청춘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가는 사람은 목적지에 다다르면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들지만 허무함도 같이 느낀다고 해요. 반면 걸어가는 과정 자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더 멀리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걷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실패는 실패한 대로 넘기고 다시 또 즐기며 걷다 보면 언젠가 누구보다 더 멀리 가 있지 않을까요?” “저도 쭉 과정을 중시하며 연기하겠다”는 그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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