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석 특집] 70kg 돌덩이를 지고 오르다
"한 번 들어봐도 되나요?"
파렛트에 곱게 누워 있는 애기봉 정상석을 보자 그런 충동이 들었다. 한 아름 크기로 앙증맞아 산부인과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안아들 듯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예사 우량아가 아니다. 팔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허리를 바싹 집어넣고 뿌리째 뽑는다는 느낌으로 힘을 줘야 간신히 들릴락 말락 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웃음에 섞인 만류가 날아든다.
"들지 마세요. 그러다 망가져요."
"아. 이러다 떨어뜨리면 제가 또 정상석을 훼손하게 되겠군요?"
"아뇨. 정상석보다 먼저 기자님이 망가진다고요."
70kg 정상석은 '가벼운' 편
지난 4월 4일 불암산 애기봉에 새 정상석이 들어섰다. 남양주시청 산림과가 사업을 발주했고, 설치는 임업 전문회사 승산이 맡았다. 지난해 3월 말 한 20대가 기존 정상석을 뽑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 지 꼬박 1년 만이다. 당시 수락산과 불암산 일대 정상석을 훼손하고 안전로프를 자른 20대는 특수재물손괴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지난 2월 20일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021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수락산 도솔봉, 도정봉, 주봉, 국사봉 정상석과 불암산 애기봉 정상석, 기차바위 안전로프 6개를 훼손한 바 있다.
"정상석이 보기보다 엄청 무겁네요. 이거 헬기로 옮겨야 되는 거 아닌가요?"
"70kg면 가벼운 편이에요. 오늘 작업 난이도를 1~10으로 따지면 1도 안 되죠. 정상석도 가볍고, 정상까지 거리도 300m 내외죠."
들머리인 불암사에서 만난 승산 이계천 대표가 답한다. 이 대표는 이번이 네 번째 정상석 설치 작업이다. 가평 호명산, 춘천 명봉, 포천 운악산에 들어선 정상석들이 다 그의 손으로 세워졌다. 운악산 정상석의 경우 크기가 커서 헬기로 수송했다.
"헬기 수송 여부는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정확하게는 사람이 옮기는 것보다 헬기로 옮기는 것이 효율이 있다고 판단될 때 헬기 수송을 의뢰하죠. 이번 애기봉은 정상석만 옮기면 되는데 다른 정상석의 경우 받침대를 같이 설치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 받침대가 정상석보다 큰 경우도 많아요. 이렇게 수송 소요가 많으면 헬기로 가는 게 낫죠."
물론 아무나 옮길 순 없다. 산림청은 산림보호법 시행규칙 42조에 따라 국가 또는 지자체가 실시하는 공익목적의 자재운반에 한해서만 산림항공본부의 산림항공기를 지원해 준다고 한다. 또 현지점검 결과 육로 이송이 가능하거나 공사비에 자재운반비가 잡혀 있어도 지원해 주지 않는다.
과정도 복잡하다. 먼저 연초에 1년 단위 산림사업 자재운반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운반 대상지의 사전점검을 한다. 자재를 내려 보내는 지역이 안전한지 꼼꼼히 살핀다. 보통 S-64, KA-32T 같은 초대형, 대형 헬기를 이용하는데 이때 기장, 부기장을 포함해 6~7명이 한 팀을 이룬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화물을 인양 줄에 결속, 공중 수송한 뒤 하화지(화물이 내려지는 곳)에 내린다.
덧붙여 산림청은 정상석을 세울 때 항공 수송을 도울 뿐, 전국 정상석을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있진 않다. 산림청 관계자는 "정상석은 각 지자체나 지방산림청이 관할지역 내에 필요할 경우 설치하고 있다. 또 일부 동호회가 설치, 관리하거나 사유지의 경우 개인이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설치기준에 대한 별도규정도 없다. 따라서 지역특색을 활용해 다양한 형태의 정상석을 세울 수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도량형. 해발고도를 표기할 때 단위를 대문자 M이 아니라 소문자 m으로 표기해야 하는데 과거에 세운 정상석들 상당수가 이를 대문자로 표기하고 있다. 보통 단위(미터) 부분만 소문자로 수정하지만, 일부 지역에선 이참에 아예 정상석을 교체하기도 한다.
한 걸음 걷는데도 땀이 주르륵
간단히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정상석을 옮긴다. 정상석이 더 무거우면 여러 명이 같이 드는 방법도 있는데 오늘은 가벼운 편이라 한 명이 지게를 지는 방식을 택했다. 지게를 지는 이는 가장 고참인 전 반장. 올해 70세라는 그는 "여전히 아침점심저녁으로 팔굽혀펴기를 100번씩 한다"며 "아파트 공사현장에선 40kg 포대를 짊어지고 몇 층을 오르내렸는데 이 정도는 천천히 쉬면서 가면 금방 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육중한 정상석을 간신히 지게에 얹고 결박한 뒤 전 반장이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가장 중요한 건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이를 위해 후배 인부가 계속 주변을 맴돌며 보좌한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어느덧 산에 거친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쓰고 뛰어 넘었을 작은 턱도 안전을 위해 몇 번이나 발의 위치를 바꿔가며 오른다.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한참 오른 것 같아 지게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니 땀이 무색하게도 들머리가 설핏 보인다.
"제가 이 일을 10년째 하고 있는데 산에서 하는 일은 노동 강도가 평소의 두 배 된다고 보면 됩니다. 현장까지 가는 데 시간도 걸리고 위험하고, 또 그렇게 오르느라 지쳐서 능률도 안 오르죠. 저도 이 일을 하기 전엔 산에 놓인 데크나 정상석을 무감하게 지나쳤는데 이젠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보이니 감사하면서 산에 다니게 됐죠."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며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오른다. 쉬기 위해 지게를 내려놓는 것도, 그리고 다시 메고 일어서는 것도 일이다. 몇 번 휴식과 고행을 반복하고 마지막 35개의 계단을 하나씩 세어가며 오르자 드디어 정상이다.
"원래 정상석은 여기서 190m 떨어진 곳에 굴러 떨어져 있었던 걸 한 달 전에 발견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원래 있던 정상석을 올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방안도 검토했는데 굴러 떨어지면서 표면이 많이 훼손됐고, 거기서 여기까지 끌어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아서 아예 새로 세우기로 했다고 합니다."
정상석 제작비는 세금 아닌 변상금
정상에 도착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먼저 가져온 물로 정상석이 세워질 곳을 닦아낸 뒤 작은 자연 돌을 구해 수평을 맞추고 그 위에 물을 섞어 반죽한 시멘트를 붓는다. 시멘트 작업이 완료되면 그 위에 정상석을 세우고 다시 한 번 수평이 맞는지 점검하면서 미장 작업을 거듭한다. 마지막 주변부 청소도 빼놓을 수 없다.
작업이 진행되는 사이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이 하나 둘 늘었다. 이길승씨는 "출근 전 새벽 4시30분에 만나 애기봉에 오르던 애기봉산악회 출신"이라며 "예전 거보다 예뻐서 보기 좋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시민은 "지난번 정상석이 동글동글해서 더 귀여웠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그래도 다시 정붙이고 잘 아껴줘야겠다"고 전했다. 2017년에 설치한 기존 정상석은 세로 50cm, 가로 30cm, 폭 25cm였고 이번 정상석은 세로 60cm, 가로 35cm, 폭 15cm로 그 크기는 거의 비슷하지만 모양새와 서체가 다소 다르다.
작업이 완료되자 어느덧 해가 중천. 오전 반나절을 다 썼다. 이 대표가 남양주 산림과 송태우 주무관에게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한다. 마침 연락이 닿은 송 주무관에게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본다.
"정상석이 돌아오기까지 왜 1년이나 걸렸나요?"
"정상석은 등산로 정비 설계용역을 통한 설계 내역서를 바탕으로 사업을 발주해 설치됩니다. 다른 등산로 안전시설 및 편의시설 정비 사업에 반영해 설치하는 거죠. 설계 약 2개월, 시공 약 5개월, 행정절차 3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정상석은 세금으로 만든 건가요? 현장에서 들어보니 제작비만 50만 원이 들었다는데요."
"훼손한 사람에게 변상금을 부과해 전액 납부 받았습니다."
"남양주 시민 입장에선 그나마 쓰린 속을 달래주는 소식이네요. 마지막으로 애기봉을 찾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정상석은 정상을 알리는 것과 더불어 포토존으로 추억을 남길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성취감도 주는 공익을 위한 시설물입니다. 모두에게 애기봉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정상석은 물론 산림을 아끼고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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