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비용’ 청구서가 쌓인다 [윤석열 정부 1년]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때부터 많은 기록을 세웠다. 0.73%포인트(24만여 표) 차이라는 '역대급 신승'만이 아니라, 최초의 검사 출신 대통령이자 최초의 0선 출신 대통령이다. 의회 경험만이 아니라 정치 경험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정치 참여를 선언한 날로부터 255일 만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수반 자리에 올랐다. 논쟁적이고 까다롭고 때로는 예측이 불가능한 사안까지도 최종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역할을 맡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3월10일 당선이 확정되고 이렇게 밝혔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 감사 인사였다. 동시에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선택은, 그를 뽑지 않은 이를 포함한 국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1년.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10일 취임 이후 또 다른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 보통 집권 초에 나타나는 고공 지지율이 없다. 취임 두 달째부터 긍정 평가보다 부정 평가가 더 컸다. 그때부터 지지율은 20~30%대를 오가는 중이다. 국정 철학 실현을 위한 동력이 부족한 셈이다. 배우자의 활동이 대통령 부정 평가의 요소로 여론조사에서 이렇게 많이 오른 적도 처음 있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이전을 임기 시작과 동시에 실행했다.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사용하던 청와대를 나갔다(이승만 대통령 당시 명칭은 경무대였고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로 개명). 제왕적 대통령제를 탈피하기 위해 청와대에 단 하루도 머물지 않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광화문 시대’였지만 실제로는 ‘용산 시대’가 열렸다. 성급하고 준비되지 않은 이전의 후과가 드러나는 중이다.
검찰총장에서 대통령 자리로 사실상 직진한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 주요 자리에 검찰 인사를 앉혔다. 금융감독원은 설립 이래 첫 검사 출신 수장을 맞이했다. 교육부 장관 정책보좌관, 서울대병원 감사 등도 검찰 출신이다. 특히 ‘윤석열 사단’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검사들은 법무부와 검찰의 요직을 차지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당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4월9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노련한 정치력이 있는 사람을 다 제치고 정치력 없는 대통령을 뽑았다. 그렇게 뽑아놓고 왜 탓을 하나”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왕 뽑았으니 도와주고 밀어줘서 대통령이 스스로 잘하도록 만들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새로운 스타일의 대통령과 함께한 지난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비용’이었다는 뜻이다. ‘윤석열 비용’을 정산해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은 4년을 위해서다.
지난 1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를 해석하는 데에는 ‘검사’라는 키워드가 곧잘 등장했다. 설명이 필요한 순간 ‘대통령’보다는 ‘검사’라는 단어를 넣고 보면 더 잘 읽힌다는 것이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무대 모두에서 그렇다.
윤석열 정부 이후 당 상황을 설명하는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국힘동일체원칙’이라는 조어를 곁들였다. ‘검사동일체원칙’에 빗댄 것이다.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검사들은 한 몸이라는, 검찰 조직 내 상명하복을 담은 말이다. 실제 검찰청법에도 명시되어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법상에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검찰 문화로 존재한다.
윤석열이라는 정치 신인과 함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5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국민의힘도 지난 1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준석 전 대표 '축출'과 ‘윤심(윤석열 대통령의 의중)’ 논란 끝에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한 나경원 전 의원, 당원 100% 룰 개정 후 꾸려진 지도부 등의 이슈를 ‘국힘동일체원칙’이라는 단어와 함께 살피면 된다는 의미다. 이 관계자는 ‘검사동일체원칙’에 익숙한 윤석열 대통령이 당내 이견을 못 견딘다고 설명했다.
비용은 큰 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년 임기 내 최저 지지율(한국갤럽 기준 지난해 8월 첫째 주 24%, 이하 모든 여론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은 이준석 전 대표와의 갈등 국면에서 처음 드러났다. 같은 주에 국민의힘 지지율도 ‘데드크로스’를 겪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줄곧 더불어민주당(민주당)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던 지지율이 역전됐다. 지난해 7월 넷째 주 동일하던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율(36%)은 한 주 사이 5%포인트 차이로 벌어졌다(국민의힘 34%, 민주당 39%).
3월8일 전당대회에서 새롭게 뽑힌 국민의힘 최고위원들의 실언이 계속되고 있다. 김재원 수석 최고위원의 전광훈 목사 관련 발언부터 조수진 최고위원의 '쌀 소비를 위한 밥 한 공기 다 비우기' 제안, 태영호 최고위원의 역사 왜곡 주장 등이 이어졌다. 국민의힘의 또 다른 관계자는 “당원 100% 룰 개정의 대가”라고 표현했다. 민심과 유리된 최고위원들이 당선될 수 있게 전당대회가 설계됐고, 그에 따른 결과라는 얘기다.
이런 리스크가 내년 총선에서 청구될 ‘어음’이라는 걱정이 나온다. 수도권 출마를 준비 중인 한 국민의힘 인사는 “이렇게 가면 수도권 선거는 폭망(폭삭 망한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국민의힘은 소수 여당이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계속 윤석열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내년 총선이 중요하다. 수도권에서 이겨야 한다. 수도권 승리에 지금 지도부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우리 당 입장에서 현재로서 믿을 건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다.”
무슨 말일까. 당내 개혁이 어려운 상황에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 대한 비토를 최대한 모아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야당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 저공비행을 지켜보며 총선 승리를 기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여럿이다. “아무리 민주당이 미워도, 총선은 결국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면 지금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1당은 지킬 수 있다.” 중도층에 영향을 크게 받는 수도권 지역 민주당 의원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공통된 반응이다.
허약한 윤석열 체제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더욱 부추기는 모양새가 됐다. 윤석열 정부에 실망한 이들에게 기대는 민주당과 그러한 민주당의 잘못에 편승하는 국민의힘이라는 악순환 속에서 ‘무당층’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정치권 전체가 반사이익 그 이상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불거졌다.
8단계 떨어진 2022년 한국 민주주의 지수
지난 2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발표는 이를 뒷받침한다. 2022년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2021년에 비해 8단계 떨어졌다. 전체 167개국 중 24위를 기록했다. 항목별 평가 중 ‘정치 문화’ 부문이 전체 순위 하락을 이끌었다. “정치인들이 합의를 모색하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정적(rival politicians) 제거에 정치적 에너지를 집중한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현재 이러한 대결 구도를 완화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 0.73%포인트 차이라는 초접전으로 당선될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다. 당선 직후 첫 공식 일정으로 방문한 국립현충원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위대한 국민과 함께 통합과 번영의 나라 만들겠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썼다.
집권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야당과 회담을 하지 않았다. ‘피의자’로 여긴다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만이 아니다. 윤호중·박지현·우상호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당 원내 지도부와도 공식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정의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선일보〉와 한 신년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야당과 직접 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잘 지내야 하는데 서로 간에 생각이 너무 다르다. 대화가 참 어렵다. (중략) 일단 여당이 야당과 자주 대화를 하도록 하고 국회 의장단과의 소통을 통해 국회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국회 몫으로 넘겼다.
대신 야당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감추지 않았다. 제63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격한 말을 쏟아냈다. “4·19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피와 땀으로 지켜온 민주주의는 늘 위기와 도전을 받고 있다. 독재와 폭력과 돈에 의한 매수로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재명 대표 등 야당을 겨냥한 발언이라는 뒷말을 낳았다.
국민의힘 한 원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검사식 세계관’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검사는 상대를 피의자와 피의자가 아닌 자로 나눠 대하는 훈련을 받은 직업이다. ‘검사 윤석열’에서 ‘대통령 윤석열’ 모드 전환이 덜 되었다는 비판이다. 27년을 검사로 살아온 윤석열 대통령의 사고 패턴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최고 정치인 자리에 있는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흑백이나 선악으로 일도양단해서 세상을 바라보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국제정치에서도 검사식 세계관이 발현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3월 한·일 정상회담, 4월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일 vs 북·중·러’ 구도에 적극 편입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자유주의 진영의 세력화가 강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는 나라들도 일방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조차도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해서는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 3월21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손을 부여잡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 기금을 통해 3000만 달러의 살상 능력 없는 장비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무기 지원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표했다.
반면 4월19일 공개된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로이터 통신 인터뷰는 당장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왔다. “만약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라든지, 국제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학살이라든지,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인도적 지원이나 재정지원에 머물러 이것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시사하는 최고 결정권자의 발언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연방안전보장회의 부의장은 “우리가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북한에 최신 무기를 제공한다면 한국 국민들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라고 받아쳤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일은 대통령의 최우선 책무다.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국제정세 흐름에서 적과 친구라는 이분법으로만 상대를 인식할 경우 치르게 될 비용은 명확하다. 익명을 전제로 한 정치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백번 양보해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내정치 행보에 대한 비용은 자기 지지율을 깎아먹는 것이라고 치자. 윤 대통령이 외교무대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차원이 다르다. 국가 전체의 코스트(비용)로 돌아온다. 너무 위험하다.” 나라 안팎으로 ‘윤석열 비용’의 청구서가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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