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②] 3. 인제 수몰민들의 수난
인제 청구동·남전리 북한 지척
6·25전쟁 때 포탄을 피했지만
소양강댐 건설로 수몰 못 피해
‘먹고 살기’위해 타 지역·해외로
돌아온 인제, 각종 규제 가득
늘 수몰 전 모여살던 이웃 생각
친구들 이웃들 모두 찾고 싶어
고향을 잃은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는 보상을 잘 받아 서울로, 일산으로 가서 지금 부자가 됐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강원도에 남아있는 수몰민 대부분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들은 본격적인 생존경쟁에 내던져졌다. 그때부터는 ‘살아남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누군가는 쿠웨이트로, 또 어느 부부는 속초에서 다른 삶을 꾸려보기도 했다. 타의로 고향을 떠난 그 삶이 순탄할 리 없었다.
■ 전쟁 때도 돌아왔던 고향
김철호씨 “수몰 후 먹고살려고 쿠웨이트서 1년 고생”
아버지 때부터 짓고 있던 농사를 계속 지으며 살겠다는 소박한 꿈은 소양강댐 등장과 함께 물 아래로 잠겼다. 일제강점기 당시 고난에도,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게 된 6·25 전쟁 때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고향이다. 그러나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고향과의 인연도 끝이 났다.
김철호(81)씨는 인제 남면 출신이다. 그가 살던 곳은 청구동이라고도 불렸고, 누군가는 구룡마을이라고도 했다. 땅도 좋았고 농사도 제법 됐던 곳이다. 그가 기억하기로 일제강점기 때 330㎡(약 100평)에서 쌀 다섯가마가 나올 정도였다. 800여 세대가 모여 살았으니 작지는 않은 마을이었다.
북한을 지척에 둔 터라 6·25 전쟁 전에도 북한군과의 전투가 끝없이 이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그가 다섯살쯤 됐을 1948년, 북한 군은 물가에서 놀고 있던 그를 향해 총을 쐈다. 김철호씨가 처음 직면한 죽음의 순간이다. 북한군은 지금 어론초등학교가 있는 자리까지 밀고 내려오기도 했다. 공격하고 맞서기를 수차례, 그러다 6·25 전쟁이 터졌다.
고향 근처에서 움막을 지어 전쟁의 포탄을 피한 그의 가족들은 전쟁이 끝나자 예전에 살던 곳에서 다시 생활했다. 김철호씨는 “다행히 고향이 수복됐고 군인들도 마을에 있을 때라 집을 지어 살게 됐고 그 생활이 수몰 전까지 계속됐다”고 했다.
■ 치솟는 땅값 먹고살기 위해 외국행
그가 서른살 쯤 됐을 무렵, 댐이 들어서 이사를 가야한다는 얘기가 마을에 돌았다. 나라에서 보상을 좀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도 ‘좀 사는’ 사람들 얘기였다. 받은 보상금으로는 도저히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다. 3.3㎡ 당(1평) 500원을 받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2000원, 3000원으로 뛰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김철호씨의 부친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그의 가족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결국 소양호와 인접한 변두리 땅을 구할 수 있게 됐고 50년째, 김철호씨는 그 곳을 지키고 있다.
김철호씨는 “우리 노인네(아버지)가 발품을 팔아봤지만 보상이 시작되고 땅을 사야 되는 사람들이 퍼지니까 땅값이 순식간에 몇 배로 뛰었다”며 “원래도 고지식하셨고,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았으니 다른 데 나가 살아도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땅값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렇게 눌러 앉은 게 벌써 50년”이라며 “이제는 나도 늙고 어디 갈 일도 없다”고 했다.
고향은 물에 잠겼고 이웃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는 ‘먹고 사는 일’을 고민해야 했다. 김철호씨는 쿠웨이트로 향했다. 외국에 나가서 1년만 고생하면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들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김철호씨는 “먹고살기 급급하니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그는 주택공사에 투입됐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읍을 하나 만들고’ 돌아왔다. 생전 처음 겪어본 햇볕과 눈도 뜨기 힘든 모래바람이 그를 덮쳤다. 고향을 잃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1년만에 650만원을 벌었다. 당시로서는 웬만한 집 전 재산 수준이었다. 그 돈으로 땅을 좀 더 샀고 아내와 매운탕집을 차렸다. 당시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많이 왔고 배를 타고 소양호를 둘러보는 관광코스가 유행이었으니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소양강댐은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자연환경보전지구’에 막힌 영업허가
야심차게 시작한 매운탕집은 규제에 가로막혔다. 소양호 바로 앞에 위치해 있어 근린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여행을 온 신혼부부들과 그들을 실어나르는 택시기사들에게 매운탕을 팔다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대로 주저앉자니 억울했다. 마침 당시 인제군수가 그의 식당을 찾을 일이 있었고 이 때를 놓치지 않은 김철호씨는 자신의 상황을 군수에게 설명했다. 군수가 대책을 마련해보라 직원들에게 지시했지만 담당 과장은 또다시 ‘자연환경보전지구 제103호’를 들고 나왔다. ‘자연환경보전지구 제103호’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김철호씨가 “자다가도 일어나 말 할 정도”로 귀에 인이 박이게 들은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철호씨는 영업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됐고 그를 시작으로 인근 몇몇 가게도 같이 장사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소양강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긴지 50년, 이제는 그때를 기억하는 이가 몇 남지 않았지만 김철호씨는 그래도 예전 이웃들이 그립다. 김철호씨는 “서로 모여살던 이들끼리 같이 밥먹고 얘기하던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 인제 덕산에서 남전, 그리고 속초
김학수씨 “속초로 이주했지만 노가리 배 타며 고생”
박옥순씨 “식당 수몰 속초행 1년만에 인제 귀향”
김학수(85)·박옥순(84)씨 부부는 인제 남전리에서 국수를 팔았다. 고향은 덕산리였지만 결혼 후 이들은 남전리로 향했다. 남전리에서만 7년을 살았다. 처음부터 국수장사를 계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과 딸을 낳고 남편 김학수씨가 군대에 갔다.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있던 박옥순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남전리에는 군인들이 많이 있었고 박옥순씨가 해준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박옥순씨는 “김도, 계란도 없는 국수를 그렇게 맛있다고들 먹었다”며 “군인들도 우리집 국수 팔아줘야 된다고 자주 찾아 그래도 꽤 장사가 잘 됐던 편”이라고 했다.
당시 상황같으면 계속 남전리에서 국수장사를 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소양강댐이 들어선다면서 남전리를 떠나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위치를 보니 국숫집이 물에 잠기게 됐다. 집 터 정도 보상을 받고 이들 부부는 속초로 향했다. 바닷가에 가면 그래도 먹고살게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 곳에서 1년을 겨우 버텼다. 자정까지 노가리를 손질하고 새벽에 노가리 배를 타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와중에 다섯 남매의 새벽밥까지 챙겼으니 부부의 고충이 적지 않았다. 박옥순씨는 “1년 살아보니 못살겠어서 할아버지(남편 김학수씨)한테 인제로 돌아가자”고 했다.
국숫집에서의 일들도, 속초에서의 생활도 부부의 기억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박옥순씨는 “호강한 기억이 있어야 추억이 되는데 고생한 일 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고 하자 남편 김학수씨가 “고생은 추억이 아니냐”고 받아친다. 그러면 아내 박옥순씨는 “고생했다는 말은 못하고 매번 저런다”고 푸념한다.
그래도 7년을 살던 국숫집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박옥순씨는 “국수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떠나야 했던 그 때는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고 했다.
■ 가족과도 공유할 수 없는 그리움
김성 씨 “기분이 울적할 때면 물에 잠긴 고향 그려”
인제 남면 남전리 출신 김성(64)씨가 기억하는 남전리는 인제 최고의 번화가다. 미10군단과 3군단이 있어 당구장과 주점, 하숙집, 부식가게가 들어섰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아스팔트 도로까지 보유한 곳이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그의 집은 신남으로 이사를 왔고, 50여 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마을이 수몰되면서 한 집, 두 집 떠나간 터라 이렇다 할 연락처도 없던 시절 그나마 그가 아직까지 고향을 얘기할 수 있는 상대는 화교인 동네 후배다.
당시 인제에도 화교들이 모여있었고 물에 빠져 죽을 뻔한 화교 후배를 김성씨가 구해준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김성씨는 “아스팔트 도로를 보유하고 있고 화교까지 살고 있었으니 남전리가 얼마나 번화가였겠는가”라며 “물에 빠졌던 후배는 아직까지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대만에 갈 때마다 무척 잘 대접해준다”고 했다.
대만에 살고 있는 후배와 진주, 춘천에 살고 있는 친구들까지. 수몰되기 전 남전리를 기억하는 이는 이들 정도다. 지금도 소양호를 바라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기분이 울적할 때면 38대교 인근을 찾아 물에 잠긴 고향을 한참 내려다보기도 한다.
김성씨는 “이제 고향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며 “자식들도 모르고, 나만 아는거다. 얘기할 필요도 없고 얘기를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같이 놀던 친구들, 정을 나눴던 이웃들은 지금이라도 찾고 싶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김성씨는 “만약이라는 게 어디 있느냐”면서도 “어렸을 적 물고기가 많았는데 물고기 잡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소양호는 그렇게 수몰민들의 한과 그리움으로 채워지고 있다. 오세현 tpgus@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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