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거야" 협박에 폭력까지... 성정체성 인정하지 않는 가족에 분노[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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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레즈비언이고 사귄 지 3년 된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저의 성정체성과 여자친구와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큰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우연히 저와 여자친구의 모습을 목격해 알게 된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오빠가 제 전자기기에서 정보를 몰래 빼내 저와 여자친구가 나눈 대화를 어머니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자친구 부모님의 휴대번호를 몰래 알아내 직접 만나서 교제 사실을 전달하기도 했고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저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 때문에 신경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받게 됐고 가족들은 그 사실을 '동성애자라서 정신병원에 다닌다'라고 치부하며 저를 아픈 사람 취급했습니다. 이후 더는 집에서 살 수 없어 집을 나왔고 2주쯤 뒤 짐을 가지러 집에 갔는데 엄마가 대화를 하자고 하셨어요. 대화를 거부하자 어머니는 다짜고짜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손목을 꺾어 제압을 한 뒤에 30초가량 숨을 못 쉴 정도로 목을 졸랐어요. 20분간 실랑이 끝에 겨우 집을 나서는데 마침 집에 들어오던 아버지와 마주쳤어요. 엄마가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자 뛰어서 도망을 쳤고 밖에 있어서 상황을 모르던 여자친구도 뒤따라 달렸습니다. 부모님은 차를 타고 저희 둘을 쫓는 과정에서 여자친구가 차에 치일 뻔한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날은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어요. 아직까지도 검은색 차만 보면 가슴이 떨립니다.
이후 여자친구 부모님으로부터 부모님이 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저를 만나 설득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학교로 찾아올까 겁이 났던 저는 상담센터를 찾아본 뒤에 거기서 만나자고 이야기했고, 그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의 충동적인 감정과 폭력의 희생양으로 살았어요. 어머니는 사고뭉치인 오빠보다 저에게 학업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은 날은 손목을 꺾으면서 겁을 주셨어요. 어느 날은 말대꾸를 한다며 과도를 들고 와서 칼로 찌르겠다고 위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못살겠다고 이야기를 하니 엄마는 오히려 '죽으라'며 베란다로 떠밀었습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며 머리채를 잡히는 날도 있었고, 심기를 잘못 건드리는 날엔 이유 없이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친오빠가 여덟 살이던 저에게 유사성행위를 시도했을 때도 엄마는 오빠와 저를 똑같이 나무라셨습니다. 당시엔 아무것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며 치욕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어머니에게 '오빠에게 말해 사과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무반응이었죠. 아버지는 제가 어린 시절 마음대로 수년씩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해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한부모 가정이란 생각으로 살았죠.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저는 점점 남자가 무섭고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고등학교 시절 저는 스스로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했습니다.
가족을 겨우 벗어났는데 다시 아버지를 만나기로 한 게 잘한 결정일까요. 지난 저의 성장과정, 가족과의 관계를 돌이켜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요.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을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요즘은 노출 심한 옷을 입거나 남성에게 열광하는 여성,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도 강하게 느낍니다. 떳떳하게 제 자신을 잘 지키면서 소수자로서 목소리도 잘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민(가명·24·대학생)
지민씨, 아무리 큰 상처를 준 부모라도 그 부모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민씨는 스스로가 자신을,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을 잘 알고 있기에 잠시 가족과 떨어져 있기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어요. 그 가족과의 만남을 앞두고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뭘까요. 당신을 학대하고 심지어 '생존'의 위협을 가했던 어머니, 아버지가 여전히 신경이 쓰이고 그분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은 왜 생기는 걸까요. 먼저 지민씨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살펴봅시다.
지민씨의 어머니는 혼자 생계와 양육을 감당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감정조절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분이었어요. 내면의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건드려지면 아주 충동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언제나 가장 약자인 자녀, 특히 지민씨에게 화를 내고, 과하게 나무랐지요. 부모가 사랑과 보호를 해주기는커녕 늘 자신을 몰아세우고 공격을 하는데 어린 지민씨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지민씨에겐 너무나 버겁고 힘든 어머니였지요. 더구나 어머니는 오빠의 성추행이라는 심각한 사건을 목도했을 때도 책임 있는 대처를 하지 못했어요. 아버지도 그런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모 아래 자란 자녀들은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자긍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이의 자존감이란 부모가 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자라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부모들에게 일상적으로 자녀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학업 성취 같은 결과에 상관없이 존재 자체를 인정해주라고 조언하는 이유입니다. 안타깝게도 지민씨의 어머니는 자녀보단 내 자신의 감정이 먼저인 분이었어요. 자신의 충동적인 기질과 내면의 괴로움을 어린 자녀를 감정받이 삼아 독설과 폭력으로 전가한 거예요. 명백한 '학대'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기는커녕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으로 학대를 경험하면서 내면에 강한 분노가 쌓여왔을 거예요. 남성 가족에 대한 혐오에서 나아가 남성과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까지요. 성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이 핵심인 듯 보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갈등의 골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저는 그런 어머니, 가족을 잠시 떠나기로 한 그 결정을 깊이 존중해요.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를 상대로 한 주도적인 결정이었죠. 부모에게서 안정적인 인정과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결정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 남과 다른 성정체성을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도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지민씨의 동성애적 성향은 그 자체로 정신의학적 문제가 아니에요. 부모 세대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지만 부모가 자녀의 성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가장 먼저 보여야 할 태도는 인정과 수용이에요. 고민이나 고통도 나눌 수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지민씨는 그 문제로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폭력을 경험했지요.
이런 식으로 감정적 트라우마 상황을 자주 경험하다보면 사람은 감정의 벽을 스스로 세워서 자신을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에선 감정이 무뎌지고 강렬한 감정을 경험할 때만 살아있다고 느끼지요. 이른바 '복합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과거 회상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되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지민씨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 회상과 복수에 몰입하면서 감정적인 고통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집을 떠나기로 한 결정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보호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 나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지요. 전문가로서 조언을 드리자면 다시 가족을 만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분노와 공격으로부터 지민씨를 보호할 수 있도록 경찰이나 상담사 등 제3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거 부모님이 지민씨와 여자친구에게 보인 행동은 상당히 위험한 수준으로 보여집니다. 성정체성 갈등을 빚는 부모와 자녀 간에 벌어지는 통상적 수준을 벗어났어요.
지민씨, 가족과의 만남 이후에도 가족을 떠올리면 공포감에 압도되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하며, 반대로 분노가 치미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가족과 당신을 인간으로서 돌아보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모자식 관계가 아닌 인간 자체로 이해해 보고 그들로부터 받았던 부정적인 영향을 그대로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 극복은 직면이 필수라는 이 점이, 물론 참 힘듭니다. 하지만 그래야 분노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혐오, 부적절한 죄책감과 위축된 마음 등 부정적인 감정의 흐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요.
성소수자로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었지요. 제가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얘기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보다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안정감과 유능감을 경험했으면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면 내면의 불안감과 분노가 줄어들고 다른 에너지를 채워갈 수 있어요. 내가 정말 내고 싶은 목소리가 있는데 분노와 혐오 감정에 압도돼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내 좌절을 반복하면 안 되겠지요. 평생 감정적 고통을 당한 지민씨가 임시방편이자 악순환의 고리인 분노와 복수가 아닌, 지민씨의 주도적인 인생 설계와 행복에 몰입하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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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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