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구리·리튬값 급락… 세계경기 급랭 신호탄인가
전 세계에 경기 침체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원유, 구리, 리튬 등 주요 국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경기 침체 불안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것이다. 이에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초점도 물가에서 경기로 바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도 지난달 물가가 3%대로 내려온 만큼 정책 무게중심을 경기로 옮겨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기 부침 미리 알리는 원자재
경기 예측을 잘한다고 해 ‘닥터 코퍼(Dr. Copper)’라고 불리는 구리 현물 가격은 4일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톤당 8539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올해 1월 고점(9436달러)보다 9.5% 떨어졌다. 전선이나 탄약 등 전통 산업뿐 아니라 전기차와 신재생에너지 발전 등에도 핵심 재료로 쓰이는 구리는 중국의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기대감 등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승세를 탔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구리 가격이 1만500달러를 찍고 장기적으론 1만5000달러까지 갈 것으로 봤다.
이런 예상과 달리 구리 가격은 연초 이후 내리막이다. 리오프닝에도 중국 제조업 경기가 예상만큼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1분기(1~3월) 중국의 구리 수입량은 130만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 줄었다.
‘배럴당 100달러’ 전망이 나오던 국제 유가도 최근 하락세다. 석유 수출국들의 감산 이슈로 4월 배럴당 83달러 선까지 올랐던 서부텍사스유(WTI)는 최근 60달러대로 떨어졌다. 4월 중국의 제조업 PMI(구매관리자지수)가 다시 위축된 데다, 미국의 지역 은행권 불안으로 경기 우려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얀 석유’로 불리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리튬 가격도 급락세다. 이달 초 상하이 비철금속 거래 시장에서 탄산리튬 가격은 1년 전보다 61.62% 떨어졌다.
◇하락 체감 못 하고 침체로 ‘이중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세계 성장률 전망을 종전 2.9%에서 2.8%로 하향 조정하는 등 경기 침체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원자재 가격은 올해 약세를 보일 전망이다. 세계은행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경기 침체로 인한 수요 감소 등으로 올해 에너지와 비료 가격이 작년보다 각각 26%, 37%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또 금속과 식량 가격이 각각 8% 떨어지는 등 전체 원자재 가격이 작년보다 21%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물가가 워낙 많이 오른 터라 원자재 가격 하락을 체감하긴 쉽지 않다. 가령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작년의 절반으로 떨어져도 2015~2019년 평균에 비하면 거의 세 배 높은 수준이다. 인더밋 길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급등했던 식량과 에너지 가격은 세계 경제 성장 둔화와 온화한 겨울 날씨 등으로 안정세에 접어들었다”며 “하지만 물가가 이미 매우 높아진 상태라 소비자들에겐 거의 위안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경기가 하강하면 고물가에 경기 침체라는 ‘이중고’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물가 선방 한국 ‘경기로 무게 추 옮겨야’
고물가와 경기 침체라는 딜레마에 시달리는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물가에 대한 시름은 한층 던 상태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7%로 14개월 만에 3%대에 진입했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쟁 이전 수준(2022년 2월)으로 물가가 빠르게 둔화한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그룹에선 한국(3.7→3%대), 미국(7.9→5.0%), 캐나다(5.7→4.3%), 스페인(7.6→3.1%), 벨기에(9.5→4.9%), 네덜란드(7.3→4.5%) 등 6국에 불과했다.
현재 3%대 이하 상승률을 기록 중인 나라도 한국과 스페인(3.1%), 룩셈부르크(2.9%), 일본(3.2%), 스위스(2.7%) 등 5국뿐이다. 한국은 가장 물가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국가에 속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제 물가 안정보다는 경기 부양 쪽으로 차츰 경제 정책의 무게 추를 옮길 때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 물가는 3분기면 2%대로 내려올 것으로 보여 정책 무게중심을 물가에서 경기로 전환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상황”이라며 “하반기 반도체 사이클은 회복될 것으로 보이지만, 정부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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