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토론 잘하는 ‘영업사원’은 없다

천광암 논설주간 2023. 5. 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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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라고 말할 수 있는 日” 후회한 소니 회장
때 기다리며 ‘경제대국’ 토대 닦은 덩샤오핑
中, 아직은 ‘美+日’보다 큰 韓 무역상대국
할 말 ‘다’ 하려면 시간 벌며 中의존도 낮춰야
천광암 논설주간
영업사원의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토론에 이기면 상담(商談)이 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담(商談)은 공통의 이익을 확인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다. 반면 토론은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서로의 주장이 맞부딪치고 결과로써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비록 옳은 말이라도 자신을 이기려 들거나 아픈 곳을 찌르는 영업사원에게 물건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국가 간의 비즈니스도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마치 ‘상담(商談)의 시대’에서 ‘토론의 시대’로 옮겨가는 듯한 양상이다. 공동의 이익보다는 대만 문제나 ‘장진호 전투’처럼 상호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슈가 전면에 부상했다. 주고받는 말의 수위도 예사롭지 않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따지자면, 윤 대통령이 틀린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국익의 관점에서 필요한 말인지 필요하지 않은 말인지, 이득이 되는 말인지 손해가 되는 말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여지가 많다.

우리에게 중국은 대체 가능한 시장인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만 해도 중국(홍콩 포함)과의 무역이 한국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5% 정도였다. 미국 일본 두 나라와의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33.2%)에는 절반도 못 미쳤다. 하지만 2007년 그 비중이 22.8%로 미국과 일본을 합한 비중(22.7%)을 추월했다. 지금도 중국이 미국과 일본 두 나라를 합한 것보다 규모가 큰 무역상대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중국을 대체하는 시장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한중 간의 교역은 일대일 수평적인 관계인가. 2020년을 기준으로 중국과의 무역액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으로 나눈 대(對)중국 무역의존도는 16.3%에 이른다. 이에 비해 중국의 대한(對韓) 무역의존도는 1.9%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통상 갈등이 빚어졌을 때 한국은 중국보다 8배 이상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안보 문제와 달리 무역마찰에는 동맹인 미국도 이렇다 할 우군이 되지 못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 이후 롯데 등 한국 기업들이 받았던 보복 조치와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한한령의 전개 양상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 ‘노(NO)’를 할 만한 실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대놓고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위태로운 행동이다.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주 사례가 반면교사가 될 만하다. 모리타 창업주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워크맨’ 등 숱한 마케팅 신화를 쓴 경영인이다. ‘일본 주식회사’의 ‘대표 영업사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말년에 돌이키기 어려운 큰 실수를 했다. 1989년 극우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더불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쓴 일이다.

이 책은 당시 소니의 컬럼비아영화사 매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키워가던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모리타 창업주 자신도 이 책을 쓴 일을 후회한 나머지 영문 번역본에는 자신의 이름과 원고를 모두 빼도록 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의 ‘보복’도 이 책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힘이 부족할 때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실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다. 과감한 개혁개방으로 ‘경제대국’의 토대를 닦은 덩샤오핑이 좋은 본보기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를 앞두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의 리더로 나서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덩샤오핑이 내놓은 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키운다는 뜻으로, 덩샤오핑이 부연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광양회는 우리나라의 기본 상황과 국제적 역량을 대비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큰 뜻을 품고 또 약점을 잘 감추면서,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과시하는 것, 스스로 표적이 되는 것, 스스로 지른 불에 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미국이 국운을 걸고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탈(脫)중국’은 동맹인 한국으로서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나서서 중국의 ‘타깃’이 될 이유는 없다. 중국도 미국을 상대로 할 말을 하기까지는 30년의 도광양회가 있었다. 아직은 토론보다 상담(商談)이 필요한 때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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