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서 시작해 부산까지…임진년 4대 승첩으로 제해권 장악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2023. 5.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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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5> 임진년(1592년) 5월 4일~8월

- 화살·대포 퍼부으며 왜구 섬멸
- 2차 출진 연승 위풍 크게 떨쳐
- 왜적 배 20척 놀라 도망가기도

- 적의 본진 부산포 마지막 전투
- 상여 악몽 꿨지만 마음 다잡아
- 패배의식 떨치고 대승첩 거둬

1592년 5월 4일 [6월 13일] 맑음.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지시)하기를 우척후, 우부장, 중부장, 후부장 등은 오른편을 맡아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면서 정탐하고, 대장선과 나머지 배들은···(원문이 여기까지만 기록돼 있음-필자)

* 온 나라가 패배의 절망 속에 빠졌을 때 그가 구국을 향해 첫 출전하는 이날은 그를 낳은 어머니가 태어난 날이다.

이 뒤로 제1차 출진으로 거둔 옥포승첩을 비롯한 28일까지의 일기는 빠졌음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이 거둔 한산승첩을 그린 민족기록화이다. ‘난중일기’ 자체에는 비록 한산승첩에 관한 기록이 빠져 있지만, 이 승리는 조선에 불리하게만 진행되던 임진왜란의 흐름을 일거에 바꾼 쾌거였다.


5월 29일[7월 8일] 맑음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렀다.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을 만나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었다.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선진리)에 있다고 하므로 바로 거기로 가보았다. 적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가서 산 위에다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았는데 항전하려는 태세가 재빠르고 튼튼했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들을 우레같이 쏘아댔다. 적들은 겁을 먹고 무서워서 물러났다. 이 싸움으로 화살을 맞은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적의 벤 머리 수도 수없이 많았다. 한편 우리도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스쳐 뚫고 나갔지만 생명에 지장을 받을 만한 중상은 아니었다. 또한 활꾼과 격군중에서도 탄환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워 없애고 물러나왔다.

* 제2차 출진으로 거둔 당포승첩의 첫 전투인 사천해전을 기록한 일기다.

임진년 6월(1592년 6월)

사천해전에 이어 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 제2차 출전으로 거둔 4승첩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여해재단이 제작한 임진년(1592년)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1~3차 출전도(위쪽)와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상황을 담은 그래픽. 여기서 거둔 4대 승첩으로 조선 수군은 바다에서 주도권을 틀어쥐며 왜군은 극도로 위축된다. 사단법인부산여해재단 제공


6월 1일 [7월 9일] 맑음.

사량도(통영시 사량면 금평리) 바다 가운데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6월 2일 [7월 10일] 맑음.

아침에 떠나 곧장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선창(船倉)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 배들은 적을 둘러싸고 전투를 시작했다. 적선 중에 대장배 한 척의 크기는 우리나라 판옥선만 했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누각 위에는 왜장이 떡 버티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승자총통으로 비 오듯 마구 쏘아서 적장을 거꾸러뜨리니 그제야 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계속해 여러 장졸들이 일제히 힘을 모아 한꺼번에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거의 한 놈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섬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서는 놀라 도망쳐 개도(介島:통영시 산양면 추도;싸리섬)로 들어가 버렸다.

* 2차 출전에서 거둔 두 번째 승첩인 당포해전을 기록한 일기다.

6월 3일 [7월 11일] 맑음.

아침에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개도(介島)를 협공하러 갔으나, 적은 이미 달아나 버려 사방에 한 놈도 없었다. 고성 등지로 쫓아가 보고 싶었으나 아군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기 때문에 울분을 참으면서 고성땅 고둔포에서 머물며 밤을 지냈다.

6월 4일 [7월 12일] 맑음.

우수사(이억기)가 오기를 애타도록 기다리면서 이리저리 생각하며 둘러보고 있는데, 정오가 되니 이억기 우수사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돛을 나부끼며 나타났다.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서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병력을 합쳐놓고 약속을 거듭한 뒤에 착포량(통영시 당동과 마수동 사이의 해협, 착량) 바다 가운데서 밤을 지냈다.

6월 5일 [7월 13일]

경남 통영시 강구안에 복원해 놓은 판옥선. 국제신문 DB


아침에 출항하여 고성 땅 당항포에 이르니, 판옥선만큼 큰 배 한 척이 보였고 그 배의 높다란 누각에는 적장으로 보이는 자가 앉아서 중선 12척과 소선 20척(계 32척)을 지휘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적선들을 들이받아 깨뜨리면서 대포와 화살을 빗발같이 쏘아대니, 활을 맞은 자가 부지기수요 왜장의 머리 벤 것만도 모두 7급이나 되었다. 그 나머지 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지만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싸움으로 우리 군사의 위풍이 크게 떨치었다.

* 2차 출전에서 거둔 세 번째 승첩인 당항포해전을 기록한 일기다.

6월 6일 [7월 14일] 맑음.

적선의 동정을 살피며, 당항포 바다에서 그대로 잤다.

6월 7일 [7월 15일] 맑음.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서 적선이 율포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복병선으로 하여금 탐지케 했다. 적선 5척이 먼저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알고 부산 쪽 넓은 바다로 달아나는데, 우리의 여러 전선이 추격하여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한 척을 온전히 나포했고, 우후도 한 척을 온전히 나포했으며, 녹도만호 정운(鄭運)도 한 척을 온전히 나포했다. 왜적의 머리 벤 수가 36급이었다.

* 2차 출전의 마지막 승첩인 율포해전을 기록한 일기다.

6월 8일 [7월 16일] 맑음.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적을 깰 방책을 의논하면서 닻을 내리고 바다(이때의 바다는 거제 송진포였다-필자) 가운데서 밤을 지냈다.

6월 9일 [7월 17일] 맑음.

마지막으로 천성, 가덕 등지를 모두 수색했으나 왜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삼 수색해 보고 나서 군사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도 되기 전(10일)에 배를 띄워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와 다음을 기약하고 이내 진을 파했다.

6월 10일 [7월 18일] 맑음.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빠졌음. 한산승첩·안골포승첩이 7월에 이루어지는데 유감스럽게도 7월 일기는 없다.

임진년 8월(1592년 8월)

8월은 부산포승첩을 위한 달이다. 8월 1일 전라좌·우수군이 좌수영 앞바다에 모여 23일간 기동(진법)훈련을 하고 24일 부산포를 향해 출전하여 9월 1일 부산포승첩을 거두는데, 일기는 24일 여수 출발부터 28일 가덕도에 도착할 때까지만 남아있다.

8월 24일 [9월 29일] 맑음.

객사에서 정영공(조방장 정걸)을 만나고 동헌에서 아침밥을 같이 했다. 곧장 자리를 침벽정(㓎碧亭)으로 옮겨 부산포로 가 적 칠 일을 의논하는데 우수사(이억기)가 와 셋이서 점심을 함께하며 뜻을 같이했다. 오후 4시쯤에 배를 띄워 노를 재촉해 노량에 이르러 바다 가운데 닻을 내렸다. 다시 자정에 달빛을 타고 행선하여 사천 모사랑포(사천 용현면 주문리)에 이르니 동이 트는데 새벽 안개가 사방에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8월 25일 [9월 30일] 맑음.

오전 8시쯤에 안개가 걷히고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니 평산포 만호가 와서 공장(公狀, 공식적으로 만날 때 내는 편지)을 바쳤다. 거의 당포에 다달았을 때 경상우수사(원균)와 만나 배를 매 놓고 적을 칠 일을 의논했다. 오후 4시쯤에 당포에 도착했고 거기서 밤을 지냈다. 한밤중에 잠시 비가 내렸다.

8월 26일 [10월 1일] 맑음.

견내량에 이르러 배를 세우고 우수사와 더불어 적 칠 일을 의논했다. 순천부사 권준도 왔다. 저녁에 배들을 옮겨 각호사(角乎寺; 현재 거제 사등면 오량리에 있는 신광사)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8월 27일 [10월 2일] 맑음.

영남우수사(원균)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천도에 이르자 웅천현감 이종인이 와서 이야기했다. 들으니, 왜적의 머리를 35급이나 베었다고 한다. 저물녘에 제포의 서쪽 원포(창원시 진해구 원포동)로 건너가니 밤이 벌써 10시나 되어 배 위에서 잤다. 서풍마저 차게 부니 나그네 마음이 산란한 데다 이날 밤에는 꿈자리조차 심히 사나웠다.

8월 28일 [10월 3일] 맑음.

새벽에 앉아 간밤의 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흉몽(凶夢)같이 생각되었지만 다시 바꾸어 생각해 보니 길몽(吉夢)이라 생각되었다. 가덕에 도착했다.

적의 본진이 있는 부산을 공격하는 것은 꼭 이겼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너무 벅찬 전투였다. 그 끝에 그는 27일 악몽(시신을 보고 상여 나가는 꿈이었을 것이다.)을 꾸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부정적 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날 일기에서 보듯 흉몽을 길몽으로 애써 마음을 돌렸고 스스로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부산포 해전을 대승첩으로 끝낸다.

29일 부터 12월30일까지는 빠졌음.

※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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