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간호법 둘러싼 제로섬 게임 끝내자

기자 2023. 5.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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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을 둘러싼 의료계의 벼랑 끝 대치가 파업으로 치닫고 있다. 의사협회를 포함한 의료인 단체들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총파업을 하겠다고 하자, 이번엔 간호협회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간호법을 둘러싼 여러 의료 직역 간 갈등이 파업으로 이어지면 애꿎은 국민은 불편을 겪고 의료계에는 큰 상처를 남긴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 교수

그런데 간호법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렇게까지 벼랑 끝 대치를 할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원래 의료법에 있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에 대한 조항을 옮겨온 것이 아니면 새로운 내용이기는 하나 선언적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인 등 거동이 불편한 국민이 집에서도 간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내용이 있긴 하지만, 의사협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간호사가 단독으로 개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료법에 의사가 아니면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롭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제정된다고 당장 달라질 것은 전혀 없는 간호법을 둘러싸고 의료인들이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먼저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규정하고 있는 의료법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이다. 의료법은 의사의 업무범위를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를 임무로 한다’라고 단 한 문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호사의 업무에 대한 조항도 4문장에 불과하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선진국의 법은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간호법은 간호사의 업무를 10페이지 넘게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정하는 절차도 투명하지 않다. 정부는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주먹구구식으로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정해왔다. 구체적 규정이 없어 오랫동안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사가 모두 초음파 검사를 하고 있다가 어느 날 분쟁이 생기면 그때야 정부가 나서 규칙을 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니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니 다른 의료인들이 독립된 간호법에서 간호사를 중심으로 업무 범위를 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업무 영역을 침범당할 거라고 우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임의 규칙은 허술하고 규칙을 정하는 절차도 불투명하니 경기를 하는 팀 간 다툼이 심할 수밖에 없다.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정하는 법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먼저 모든 의료인이 주도적으로 자기 직역의 업무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을 고쳐 의사,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응급구조사 등 모든 직역별로 업무 범위를 정하는 위원회를 두면 된다. 자기 직역에만 유리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국민과 전문가를 위원회에 참여시키고, 상위에 업무 범위를 조정하는 위원회를 두면 된다. 선진국에서는 다 이렇게 한다.

국민이 더 좋은 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진료환경에 따라 의료인 간 업무 범위의 중복을 합리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집을 찾은 간호사가 의사 처방이 없어 혈압·혈당도 못 재거나, 병원 밖에서는 응급환자에게 주사도 놓고 심폐소생술도 하는 응급구조사가 병원 응급실에서는 채혈도 심전도 측정도 못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처럼 배타적으로 각 의료인들이 자기 업무 범위를 설정하면 국민은 다른 나라처럼 좋은 의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현재와 같은 배타적 업무 범위 설정은 의료인에게도 손해다. 의료의 질과 효율성이 떨어져 일자리가 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사 처방이 없어 혈압·혈당도 못 재는 간호사의 방문을 어느 국민이 원하겠으며, 응급실에서 채혈도 심전도도 할 수 없는 응급구조사를 어느 병원이 고용하려고 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간호법을 둘러싼 갈등의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의료인의 업무를 단 한 문장으로 규율하는 의료법 조항은 1962년 개정된 이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법이 허술한데도 의료인의 업무 범위를 정하는 별도의 위원회도 없고 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정부는 “간호법이 최적의 대안이 아니다”라는 유체이탈화법으로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의료인 업무 범위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을 끝낼 책임있는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권도 간호법 갈등을 정쟁의 불쏘시개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합의해 준 간호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도 반대하는 단체를 부지런히 찾는 여당도, 극단적인 갈등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합의안이라는 명분으로 원안을 밀어붙인 야당도 문제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국회는 간호법 갈등을 더 나은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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