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여기는 모두 진짜잖아요

기자 2023. 5.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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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는 아들네가 찾아왔다. 여기저기 허물어져가는 빈집이 많아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산골에 찾아오는 까닭이 무얼까?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찾아오는 까닭이 세 가지쯤 되는 듯하다. 첫째는 아직 두 돌도 안 된 아기를 돌보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고, 둘째는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로 산바람 쐬면서 머리 식히고 싶을 때다. 셋째는 제 어미가 해 주는 ‘산골 밥상’을 받아먹고 싶을 때다. 농사철에 일손 거들고 싶어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반갑게 맞이한다. 삶이 고달프면 언제든 오라고 덧붙여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시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서정홍 농부 시인

도시는 경쟁에 이기지 않고는 살아남기 쉽지 않은 곳이다. 지구촌에 돌림병이 야단법석을 떨 때 아들 녀석이 그랬다. “아버지, 코로나19가 겁나는 게 아니에요. 아내와 애랑 먹고사는 일이 더 겁나요.” 그렇겠지. 먹고사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을 테지. 먹고사느라 바빠 마음 나눌 따뜻한 벗이나 이웃을 사귈 여유나 낭만도 없을 테지. 그러니까 하루 내내 초미세먼지 마시는 것보다 더 팍팍한 삶을 살고 있을 테지.

더구나 번개처럼 다가오는 월세에다 아파트 관리비와 전기요금과 전화요금 그리고 생활비 등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기 어려운 곳이 도시니까. 이런 현실에 식구들 데리고 산골에 오려면 교통비도 만만찮을 것이고,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틈이 나면, 아니 틈을 내어 산골에 오려고 애를 쓴다.

“아버지, 저희 집 가까이 ‘키즈 카페’란 곳이 있어요. 50분간 머무는데 아이 한 명에 1만8000원을 내야만 해요. 작은 공간에 아이 서너 명을 집어넣고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종삽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무를 뽑는 놀이를 해요. 심지어 실리콘으로 만든 지렁이도 있어요. 가짜 꽃을 가짜 화분에 심기도 하고요. 그리고 보호자 한 명에 입장료가 3000원이고 차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 마셔야 해요. 그런데 산골에 오면 아기가 자동차에 치일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껏 놀아도 되지요. 진짜 흙바닥에 앉아 종일 공짜로 놀 수도 있잖아요. 그 무엇보다 여기는 가짜가 아니고 모두 진짜잖아요. 그래서 여기 안 올 수가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귀찮고 힘들겠지만요.”

아내는 며느리가 하는 말을 들으며 배시시 웃는다. 진짜를 알아보는 며느리가 대견해서일까?

아들네가 하룻밤 자고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창원에서 알고 지내던 어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아내와 나는 봄나물 가득한 밥상을 차려 드렸다. 같이 밥을 먹고 쑥차 한 잔 나누면서 말했다. “너무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와 어찌 살아야 할지 몰라 앞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산골에 와서 따뜻한 밥 한 그릇 먹고 나니까 힘이 생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죽을 용기로 다시 살아볼게요. 오늘, 너무 고맙습니다.”

아내와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고마운지 가슴이 짠했다. 밥 한 그릇 나누는 일이, 절망에 빠진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나누는 일은, 하늘과 땅과 모든 자연에게서 ‘밥을 받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은 결국 하늘과 땅과 모든 자연이 하는 일이다. 농부는 그저 손 한 번 거들 뿐이다. 참 고맙다.

서정홍 농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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