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19] 할아버지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5.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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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정지용(1902~?)

외래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한자어도 없이 순수한 우리말로만 쓴 아름답고 재미난 동시. ‘도롱이’ 대신 우산을 쓰며 우리가 잃어버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늘이 시커머니 어째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하던, 귀신처럼 정확했던 그분들의 일기예보가 그립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정지용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참신한 이미지와 정제된 언어가 돋보이는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에 이토록 향토색이 진한 서정시를 쓴 시인이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지용은 6·25 전쟁이 터진 뒤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그 뒤 행적을 알 수 없다. 납북되던 중 폭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말도 있고 이북에서 죽었다는 기사도 있다. 납북·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되다 1988년 해금되어 정지용의 시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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