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전직 대통령이 사는 법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큰 공적 인물이다. 그래서 ‘역사적 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벌였고, 세계 곳곳에서 인권 옹호자, 분쟁 해결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임 당시엔 ‘인기 없던’ 대통령이었던 그를 두고 미국인들은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이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고 할 정도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기념관·연구소를 만들고, 세계를 돌며 강의에 나서기도 한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실천하는 대통령들도 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노숙인 쉼터로 개방하고 자신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핀란드 첫 여성 대통령 타르야 카리나 할로넨은 12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저잣거리에서 이웃들과 수다를 떠는 시민의 삶을 보내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해도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인식, 시민 개개인이 권력의 주체라는 정치 문화가 이들을 평범한 자연인의 삶으로 이끌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정쟁의 촉매제로 소구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은 국민의 대변자지만 권력투쟁의 당사자라는 모순된 지위를 갖고 있어 퇴임 후에도 역할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금도 정치권은 전직 대통령을 앞세워 친OO계, 반OO계로 결집하거나, 전직 대통령 행보를 정치세력화 시도로 의심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가 오는 15일 참모 20여명과 청계천을 찾는다고 한다. 사면 복권 후 1년여 동안 칩거했던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는 지난달 11일 대구 동화사를 첫 외부 행선지로 택했다. 지난달 26일 자택이 있는 평산마을에 책방을 연 문재인 전 대통령은 개점 일주일 만에 5500여권을 판매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 3인의 행보가 정치 갈등의 불씨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랏일은 가급적 현직들에게 맡기고 무히카나 할로넨처럼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평온하게 여생을 보냈으면 한다. 이제 우리도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신동엽, ‘산문시 1’)을 가진 전직 대통령이 필요하지 않을까.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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