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왕관의 무게… “섬김 받지 않고 섬기겠다” [70년 만의 英 대관식]

이예림 2023. 5. 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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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시대 개막
65년 만에 ‘진짜 주인공’
전통복 아닌 군 정복 차림 등장
203개국 귀빈들 참석 축하 건네
英 국왕 대관식 첫 “모든 믿음” 언급
규모 줄이고 다양성 늘리고
힌두교 英 총리가 성경구절 낭독
‘새시대 반영’ 흑인·女 역할 부여
비용만 1700억… “혈세 낭비” 비판
빗속 환호와 야유
반군주제 단체 곳곳 ‘피켓시위’
경찰, 플래카드 압수·대표 체포
국제인권단체 “과잉 진압” 비판

찰스 3세(74) 영국 국왕 대관식이 6일(현지시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진행됐다. 1066년 이후 이곳에서 열린 40번째 대관식이다.

전통적인 반바지에 실크 스타킹을 착용했던 이전 국왕들과 달리 현대적인 군 정복 차림의 찰스 3세는 9세 때 왕세자로 책봉된 후 65년을 기다린 끝에 이날 2.2㎏ 무게의 왕관을 쓰고 “섬김받지 않고 섬길 것”이라며 영국 국왕이자 영연방의 수장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찰스 3세(74) 영국 국왕이 지난 6일(현지시간) 대관식이 거행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수여받고 있다. 이날 찰스 3세는 대관식에서 영국과 14개 영연방 왕국의 군주가 됐음을 공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규모는 줄이고, 다양성은 늘려

21세기 유럽 최초가 된 이날 대관식은 이전보다 규모는 축소했으나 다양성은 확대했다. 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 군주제 반대 여론 등을 고려해 70년 전인 1953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때보다 행사 시간과 참석 인원 모두 대폭 줄였다. 2.1㎞의 마차 행렬 길이와 2200명의 참석 인원 모두 모친 때보다 4분의 1로 줄어든 수치다. 대신 곳곳에 종교·인종·성별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시간을 준비해 영국 왕실의 현대화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특히 찰스 3세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당신의 모든 자녀와 모든 믿음과 신앙에 축복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언급했다. 기독교 기반의 영국 국왕이 대관식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믿음과 신앙’을 언급한 것이다.
영국 찰스 3세 국왕. AFP연합뉴스
비기독교 종교 지도자들도 대관식 역사상 처음으로 예식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장 먼저 입장하는 성직자 행렬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 무슬림, 불교, 힌두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동참했다. 소수 종교 지도자들이 찰스 3세에게 금팔찌와 왕실 예복 등 레갈리아(왕의 물품)를 전달하기도 했다. 힌두교도인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성경 골로새서 1장 9∼17절을 읽었다. 찬송가는 영어와 함께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일랜드어로 울려 퍼졌다. 흑인 여성 상원 의원, 카리브해 출신 여성 남작이 대관식에서 역할을 맡아 다양한 인종을 포용하려는 분위기도 엿보였다.

페니 모돈트 영국 추밀원 의장 겸 하원 보수당 원내대표는 여성 최초로 왕권을 상징하는 ‘헌납의 검’을 찰스 3세에게 전달했다. 첫 여성 국방장관 출신이기도 한 모돈트 의장은 길이 121㎝, 무게 3.5㎏에 달하는 헌납의 검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들고 국왕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입은 현대적인 청록색 의상도 화제였다. 모돈트 의장은 미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궁정 의상을 입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의상을 원했다”고 전했다.

세금으로 충당하는 대관식 비용에 1억파운드(약 1700억원) 이상 투입될 것으로 알려지며 비판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번 대관식 비용은 보안 강화 등으로 70년 전보다 약 2배 늘어났다. 전직 하원의원이자 왕실 재정 전문가인 노먼 베이커는 가디언에 “법적으로 불필요한 대관식을 치르는데 부유한 왕실 재정이 아닌, 납세자들의 세금이 들어가게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 등 203개국 귀빈 참석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대관식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영연방에 속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총리 등 약 100개국 정상들을 포함해 203개국 대표가 참석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부인 질 바이든 여사는 옅은 파란색의 원피스를 입고 노란색 원피스 차림의 손녀와 나란히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관식 직후 트위터를 통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미국과 영국의 지속적인 우정은 양국 국민 모두를 위한 힘의 원천”이라고 적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축전을 보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영국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평화, 발전, 상생 협력의 역사적 추세를 공동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3월 연금 개혁 반대 시위로 불발된 찰스 3세의 프랑스 국빈 방문을 재추진하는 등 대관식을 계기로 한 외교도 활발히 벌어졌다.
영국 찰스 3세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 지난 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중심가의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위대가 'Not My King'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습니다. AFP연합뉴스
◆군주제 폐지 시위에 52명 체포

대관식 TV 생중계를 시청한 영국인은 2000만명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9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 시청자 2900만명보다는 적지만 올해 TV 방송 중 최다 시청자 수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세기의 행사를 직접 지켜보려는 수천명 인파가 이날 빗속에서도 마차 행렬 경로를 따라 집결했지만, 한편에서는 군주제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도 나왔다.

버킹엄궁 인근 더 몰을 비롯한 곳곳에서 대관식 시작 전부터 반군주제 단체들이 “낫 마이 킹(not my king: 나의 왕이 아니다)”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중 사이에 섞여 “왕실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런던 중심부에 있는 트래펄가 광장에서 “갓 세이브 더 킹(God Save the King: 신이여 왕을 구하소서)” 제창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야유도 터져 나왔다.

반군주제 단체 ‘리퍼블릭’은 행렬이 시작되기도 전에 경찰이 시위대의 플래카드를 압수하고 단체 대표를 체포하는 등의 과잉 진압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런던 경찰은 이날 시위대 52명을 공공질서 위반, 폭행 등으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관계자는 “러시아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며 “평화적인 시위가 경찰의 과도한 진압으로 방해받았다”고 비판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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