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팔레트] 건강하게 나쁜 예술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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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달 전 일이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에무시네마에서 대만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의 회고전을 했다.
세시간 넘는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거렸는데, 영화 속 린자리·린자썬 남매가 각기 처한 상황이 그즈음 친구와 내가 각기 겪은 일과 비슷해서였다.
이것이 우울의 전형적 증상임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막상 내 일이 되니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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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석의 팔레트]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서너달 전 일이다. 서울 광화문 인근에 있는 예술영화전용관 에무시네마에서 대만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의 회고전을 했다. 나는 문학편집자로 오래 일한 친구와 함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을 보러 갔다. 세시간 넘는 영화를 보고 나온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거렸는데, 영화 속 린자리·린자썬 남매가 각기 처한 상황이 그즈음 친구와 내가 각기 겪은 일과 비슷해서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선택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로, 장고 끝에 고른 선택지라도 결과를 전혀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점까지 인생의 보편성을 쏙 빼닮아 있었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고 나면 대개 그러하듯 다른 사람의 삶을 통째로 살아버린 기분이 된 우리는 서촌을 향해 걸으며 영화를 계속 화두에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 처음 만든 장편인 만큼 영화에 본인 경험도 제법 녹아 있을 텐데 그렇다면 저 사람의 삶도, 속도 적이 고달팠을지 모르겠다고. 내 생각을 나누자 친구는 자기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하고는 갑자기 진저리를 쳤다.
“그러니까 저렇게 좋은 예술 했겠지.”
친구가 시니컬하게 내뱉은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병든 자가 좋은 예술을 하고 좋은 예술을 하면 없던 병도 생긴다. 이제 업계를 떠난 친구는 확신에 차서 그렇게 단언했다. 자기비하적인 냉소는 나도 은밀히 사랑하는 장르라 꺽꺽대면서 웃고 있는데 친구가 들썩이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는 그냥 건강하게 나쁜 예술 하세요.”
그 말에 박장대소를 멈춘 나는 콧잔등을 훔쳤다. 무심한 한마디가 퍽 따뜻하게 들린 까닭은 그 무렵 내가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있었던 탓이다.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기에 사실 올해 들어 소설가로서 내가 쓴 문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요즘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예정된 연재를 취소하고자 이렇게 메일을…. 안녕하세요 선생님, 귀한 지면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지금 글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떻게든 이번 원고를 마무리해보려고 했으나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사실 글을 쓰는 일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극히 일부였다. 사과 한 알에서 벌레가 파먹은 딱 한 부분이 멀쩡한 나머지 영역보다 더 커 보이는 현상. 이것이 우울의 전형적 증상임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막상 내 일이 되니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내 마음에 그럭저럭 드는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소한 사실 하나가 어느새 스스로를 부정하는 완벽한 이유가 되어 있었다.
창작의 영역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뚜렷한 기준이나 100점 만점도 없지만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안다. 계속 읽다 보면 ‘아, 내가 좋아하는 게 이거구나’ 싶은 순간이 가끔 나타나니까. 그 ‘가끔’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서 인물을 선택하고, 사건을 선택하고, 배경을 선택한다. 선택지는 갈림길을 기하급수로 만들고 단어마다, 문장마다, 구두점마다 또 선택해야 하는 무한한 굴레에 갇힌 채로 폭주하는 편도체는 필연적으로 불안·초조·우울을 야기한다.
다행스럽게도 <해탄적일천>을 본 날 들었던 친구의 말 덕분에 나는 서서히 필연에 저항할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 받아온 포스터를 거실 벽에 붙여놓은 나는 요즘에도 그것을 보며 자주 되뇐다. 하지 못할 것은 하지 못하겠다고 담백하게 말하기. 글 하나 못 쓴다고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최적이나 최고의 무언가를 바라지 말고 그냥 지금 행복하기. 내 기준에 조금 못 미친다 한들 폭삭 망하는 것도, 뭐 하나 달라지는 것도 없음을 알아차리기. 그냥 그렇게 건강하게 나쁜 예술 하기. 그냥 그렇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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