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말자의 수사·재판기록이 없다, 왜?
[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정은주 | 법조팀장
“너무 긴 시간에 몸이 지치다 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이런 일이 또 되풀이될 것이라 생각했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 최말자(77)씨가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의 신속한 재심 개시 결정을 요구했다.
1964년 18살이던 최씨는 성폭행하려는 21살 남성 노아무개씨의 혀를 깨물며 저항했다. 혀가 잘린 노씨는 집으로 쳐들어와 가족을 위협했다. 경찰은 최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노씨를 강간미수, 특수주거침입 혐의로 검찰로 송치했지만, 검찰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며 오히려 최씨를 중상해 혐의로 구속했다. 법원도 검찰 논리를 그대로 따랐다. 최씨에게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노씨에게는 주거침입죄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강간미수죄’가 사라지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2020년 5월 최씨는 법원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재심을 통해 정당방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다. 재심이란 확정판결에 중대한 오류가 있을 때 다시 심사하는 절차를 말한다. 재심 개시(시작)는 ①증거·증인이 거짓이었거나 ②판사·검사·경찰이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거나 ③새로운 증거가 발견됐을 때 가능하다. 최씨는 검사가 △영장 없이 구속했고 △진술거부권, 변호인 선임권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고(재심 사유②) 주장했다. 그러나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사의 위법 행위를 입증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증거가 제시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제 대법원의 결정만 남은 상태다.
과거사 사건에서는 수사의 위법성 등이 드러나 재심이 개시되는데 최씨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 최씨 수사·재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수사·재판 기록은 공식적으로 보존하는 기간이 지나면 폐기된다. 공문서 보존규칙을 보면, 형사사건 기록 보존기간은 유죄는 형의 시효까지, 무죄·불구속은 공소시효까지다. 다만 국가안보 관련 범죄 등은 예외적으로 영구 보존한다. 국가안보 범죄로 분류된 과거사 수사·재판 기록은 국가기록원 등에 남아 있는데 일반 형사사건인 최씨의 수사·재판 기록은 없어진 이유다.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사건에서 가장 힘든 것이 증거 수집”이라며 “원본 기록과 자료가 폐기된 경우가 많아 당사자 등으로부터 불완전한 사본이라도 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반 형사사건 가운데 재심이 개시된 경우는 대부분 수사·재판 기록이 이례적으로 남아 있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변호해 유명한 ‘낙동강변 살인사건’도 공식 수사·재판 기록은 폐기됐지만 용의자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사본과 문 전 대통령이 사무실에 보관하던 기록이 있었다. 1990년 1월 부산 낙동강변에서 차에 탄 남녀가 납치돼 여성이 살해됐는데, 2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간 옥살이하다 2013년 모범수로 석방됐다. 이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2021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심 개시를 결정한 법원은 결정문에서 “만약 사건 원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재심 사유가 인정될 수 있었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고 밝혔다.
일반 형사사건의 수사·재판 기록 확보가 힘든 이유는 보존기한이 짧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종이문서라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만큼 보존기한을 제한하고 기간이 지나면 폐기를 원칙으로 삼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화 작업을 거치면 얼마든지 영구 보존할 수 있다. 인력과 비용 문제로 모든 형사사건 기록을 보존할 수 없다면 중범죄로 유무죄 다툼이 있거나 당사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 기록을 보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수사·재판 기록 보존방법을 바꾸고 보존기한을 늘리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최씨가 겪는 일이 또 누군가에게 되풀이될 것이다.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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