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스페인 산티아고를 가다

한겨레 2023. 5. 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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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 광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순례자들. 사진 양희은

양희은 | 가수

북부 스페인 여행 마지막 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광장에서 생각난 한 사람!!! 올레길을 낸 서명숙이었다.

십수년 전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에 주말마다 한번 여행 이야기를 듣는 코너가 있어, 이제 막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귀국한 서명숙을 초대해 걷고, 눈에 담고, 몸으로 느낀 바람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었다. 남의 나라 길 이야기를 듣다가 고향인 제주도 역시 못지않게 아름다운데 그곳에 길 내시면 어떨까? 생각을 전했고, 마침내 주변 친지들이 부추기고 등 떠밀어 함께 걸으며 ‘올레’라는 이름도 지었다. ‘올레’란 집에서 길로 나가는 좁은 골목을 말한다는 설명을 들으며 올레 1코스가 시작됐다.

직접 겪은 것만이 자기 것일 텐데…. 걷는 대신 차 타고 온 나는 성지순례의 끝 드넓은 광장에서 관록이 붙어 땀에 절어 보이는 배낭과 낡은 운동화,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씻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싶은 모양새의 사람들을 살펴봤다. 새소리와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버스 안에서 (길)라는 영화를 봤다. 엄마의 죽음 뒤 사이가 서먹해지고 소통이 안 되는 아들을 공항까지는 바래다준 아버지는 며칠 뒤 순례길 첫날, 비바람으로 사고사한 아들의 주검을 확인하고 아들의 배낭을 진 채 화장한 아들의 재를 길 위 곳곳에 남긴다. 길에서 만난 젊은이 셋과 동행 아닌 동행으로 갈등, 분노, 슬픔, 서로 마땅찮음 속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드디어 순례길 끝에 닿는다. 뱃살을 빼고 글 쓸 거리를 찾으려 담배를 끊으려던 세 젊은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아들 잃은 아버지의 슬픔에 공감하며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고 산티아고 넘어 또 다른 길 위에 선다. 집시가 알려준 눈물의 곶에서 아들의 나머지를 훨훨 날리며 아버지는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도대체 넌 왜 걸어? 무엇을 위해 힘든 길 걸어왔느냐고?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었다.(사회자 본능)

지난 2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 광장. 순례자들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가 광장이 조금 허전해 보인다. 사진 양희은

사람들은 무엇으로 여행을 기억하는가? 미식과 탐식으로, 기막힌 와인과 맥주 맛으로, 사람과 맺은 인연으로, 기막힌 자연풍광으로, 연속된 불운의 기억으로, 쇼핑으로, 계속되는 악천후로 기억할 듯싶다. 스페인 농수축산업 종사자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대단해, 음식마다 별다른 양념 없이 질 좋은 올리브 오일과 소금, 그리고 허브가 전부였다. 설탕을 일절 안 쓰는 대신 후식만은 제법 달콤하다. 푸짐한 식사를 하면서 일행은 끊임없이 어린 날의 도시락 반찬, 짜장면, 라면, 달걀에 얽힌 이야기며 머릿니와 살충제 디디티(DDT), 쥐잡기 운동의 추억을 나누며(무슨 컬트영화 찍듯이) 웃어댔다. 아내에게 라면 맛없게 끓이기도 어렵다며 타박하는 남의 남편도 보았다. 직사각형과 원탁에 번갈아 앉아보며 두루 이야기 나누기에는 원탁이 훨씬 좋다는 걸 알게 됐다.

서울 가면 그리울 것들도 얘기했다. 누룽지와 비슷한 이 나라 빵 맛, 맑은 공기, 파란 하늘, 어디서나 들리는 새소리, 플라스틱 아닌 크고 묵직한 유리병에 담긴 생수와 와인, 느긋한 일상의 리듬, 30분 넘는 출근길에 직장을 거절한 이야기(좋은 직장 스카우트 제의받았으나 출근길 45분이라 거절했다는 가이드 남편 이야기), 내 앞으로 보이는 차가 7대 넘으면 긴장된다는 도로상황 등이 부럽고 그리울 것이라 했다.

사람마다 아끼는 게 다르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떤 이는 휴지를 그렇게 아끼고, 또 물값이 아까워 생수 사 먹기를 머뭇거리고, 종이를 아까워해 예쁜 포장지와 곁들인 리본을 깨끗이 접어 간직하고, 잠옷을 아낀 나머지 피부처럼 나달나달해진 걸 편히 걸치고 잠자리에 든다나. 알뜰살뜰하게 돈 아껴서 나를 위한 여행을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일행 중에는 나의 버킷리스트를 다 해낸 분도 계셔서 부러웠다.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 보기, 아프리카에서 뛰노는 동물 보기 등….

그분은 “가셔요. 왜 못 가요?” 묻는데 난 그냥 웃었다. 일본 아줌마들은 아무리 고달픈 일을 해도 일년에 한두번 자신을 위한 온천여행을 한다나. 따끈한 물에 몸 풀고 남이 차려주는 호사스런 밥상을 받으며 지친 일상을 다독여준단다. 우린 이번 여행의 여러가지 추억으로 한달쯤은 잘 지낼 것 같다. 우리가 집 비운 사이 엄마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긴장해서인지 똘망해지셨다. 조카딸 부부가 증손자 데리고 와서 할머니와 휴일을 보냈고 희경이네 아들이 상차림 해서 식구들이 푸짐한 식사를 했다고 한다. 94살 노모와 두마리 강아지를 놓고 긴 여행 가는 일은 앞으로 힘들겠지. 집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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