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예견된 복당,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
민형배 의원 1년 만에 복당
절차적 민주주의 훼손 비판
당도 의원도 부끄러워 안 해
신뢰 잃은 정당엔 미래 없어
검수완박이란 지상과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탈당했던 의원이 다시 복당했다. 국민뿐만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의원도, 그를 복당시킨 당 사람들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의 당위성을 인정했으니, 그의 탈당에도 문제가 없다는 궤변만 늘어놓는다. 가뜩이나 돈봉투 때문에 시끄러운데…. 이 당은 과연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노량 근처에 숨어 있던 원균은 판옥선 1척을 타고 순신의 함대가 정박 중인 당포에 도착했다.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가 타고 온 판옥선엔 대포가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도망갔던 남해현령 기효근과 미조항첨사 김승용, 평산포권관 김축 등이 함께 전투선 1척에 몸을 싣고 왔다. 이어 사량만호 이여염, 소비포군관 이영남 등이 각각 협선을 타고 왔다. 여기에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 옥포만호 이운룡 등은 판옥선 2척을 몰고 합류했다.
판옥선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탓에 아군 병선 5척만 남아 있었던 셈인데, 이것만 봐도 당시 원균을 비롯한 경상우도 수군 장수들의 지도자적 자질과 전쟁준비 수준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어찌 됐든, 이날은 경상우도와 전라좌도 수군이 합쳐 처음으로 아군의 연합함대가 편성된 날이다.
이순신은 도망갔다 다시 돌아온 경상우수영의 간부들을 차별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와 똑같이 대우했다. 공자가 주장했던 '인간다운 품성', 곧 타인의 가치와 잠재력을 인정해주는 '인仁의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도망갔든 스스로 나갔든 그런 이들을 모두 받아주는 게 '인의 요체'는 아닐 거다. 다시 돌아오는 데도, 받아주는 데도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얼마 전 검수완박이란 지상과제를 풀겠다면서 당을 스스로 나갔던 의원이 복당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해 꼼수탈당이란 비판을 받았는데도, 당도 의원도 부끄러움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쪽 진영 사람들은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의 당위성을 인정했으니 법적 정당성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헌재가 검수완박을 인정한 건 사실이지만, 그의 탈당을 꼬집지 않은 건 아니다. 헌재는 다수의견을 통해 그의 탈당은 '정당의 입법 독주를 막기 위한 국회선진화법의 취지를 위반했다'고 결정했다. 한때 공정과 개혁의 상징으로 꼽혔던 이 당은 국민의 신뢰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글쎄, 이런 행태를 계속 보인다면, 이 당에도 미래가 없다.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육지에서는 선조 일행이 평양성으로 피신한 5월 7일의 새벽,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적의 수군이 있는 가덕도 방향으로 향했다. 정오쯤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타고 있던 배에서 신기포를 쏘아 올렸다. 적의 함대를 발견했다는 신호다.
이순신 함대가 전라좌수영을 출발한 지 4일 만에 드디어 첫 해상전투가 벌어졌다. 척후선의 신호에 이순신은 초요기(대장이 장수를 지휘하던 기)를 높이 달아 각 병선의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나아가 싸우는 데 충성과 용기를 다하라. 겁내고 물러나는 자가 있으면 군법이 용서치 못하리라. 이것이 무신의 본분이요, 대의다."
옥포만에는 적의 병선이 50여척이나 정박해 있었다. 육지의 마을에서는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왜적은 조선 함대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시 배에 올라탔다. 적의 함선들은 이순신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해안을 따라 일직선 형태의 진을 펼쳤다. 선봉 6척이 이순신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조선 함대 쪽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조선 연합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90도 돌렸다. 모든 함선의 측면이 적선을 바라보게 되자 이순신이 타고 있는 대장선에서 깃발 하나가 올라갔다. 육지에서 거침없이 승리를 거머쥔 터라 적들은 조선 수군도 깔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함대의 움직임에 '뭐지?' 하는 태도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꽈광' 하는 대포 소리가 옥포만을 뒤흔들었다.
세계 해전사에 처음으로 선보인 이순신 함대의 '일시집중타' 공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포탄에 맞아 죽고, 화살에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거북선 건조만큼이나 신박한 전술이었다. 1시간 만에 26척의 왜군 전함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서 수장됐고, 나머지 20여척은 간신히 탈출로를 열어 꽁무니를 뺐다.
왜군의 주력 무기는 조총인 데 반해 조선 전라좌수영의 수군은 총통銃筒을 사용했다. 총통은 중량이 정철正鐵 200근인 천자총통, 정철 150근인 지자총통, 정철 50근인 현자총통 등으로 이순신의 주도 아래 거북선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이날 성과를 자세히 기록한 '옥포전승첩'을 조정으로 보냈다.
휘하 장병들의 전과를 깨알같이 기록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나중에 있을 논공행상을 위한 것이었다. 이순신이 부하와 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훗날 「선조실록」에도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은 진급이 모두 빨라 원균의 부하 장수들은 불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은 옥포만 주변의 육지로 도망간 왜군을 추격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장병들의 안전과 재충전을 위해 거제의 영등포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이순신 함대가 영등포에서 정박하고 있는데, 오후 4시쯤 멀지 않은 바다에 적의 함선 5척이 지나간다는 긴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적선을 추격하라!" 이순신은 곧바로 부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옥포 전투로 피곤했지만 승전 기세를 얻은 장병들은 전력을 다해 적선을 추격했다. 이순신의 함대가 웅천 지역의 합포에 이르렀을 때 적들은 재빨리 병선을 포기한 채 육지로 올라 도망쳤다.
두번째 해전인 '합포해전'에서 왜적 대선 4척과 소선 1척을 깨부수고 불살라 버리는 분멸의 성과를 올렸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과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왜군의 입장에선 육지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임진년 5월 7일 하루 동안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창원지역 남포 앞바다에 와서 진을 치고 나서야 전승을 축하했다.
다음날인 5월 8일,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진해鎭海 지방 고리량에서 왜군 병선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순신은 곧 명령을 내려 함대를 두 부대로 나눴다. 동서로 행진해 양편으로 협공할 계획이었다.
저도(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한 섬)를 지나 고성지방 적진포(경남 고성군 당동리) 앞바다에 이르니 적의 병선 13척이 바다 어구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적군의 반은 육지 마을로 올라가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고 반은 배에 남아 있었다.
여기서도 왜군은 자신들의 강점인 '등선육박전'을 펼치기도 전에 이순신 함대의 '일시집중타'에 이은 불화살 공격을 받았다. 결국 왜국 함선 13척 모두가 박살 났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는 도주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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