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한·인니 수교 50주년, 한상의 역할

2023. 5. 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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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수교한 지 50년이 됐다. 양국이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반백 년이지만, 인도네시아 한인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인도네시아 동포들은 1973년 두 나라의 외교 관계 수립과 양국 발전에 밑바탕이 됐다. 그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인도네시아 한인의 뿌리는 독립운동가 장윤원 선생이다. 그는 일본군에게 쫓겨 1920년 9월 자카르타에 정착했다. 그의 차남 장순일은 인도네시아 명문 대학 아트마자야대학 설립을 주도했으며, 대학병원도 건립했다.

장윤원 선생에 이어 1408명의 조선인 군무원이 1942년 8월 인도네시아 탄중프리옥항에 내렸다. 그들은 초기 인도네시아 한인사의 근간이 됐다.

조선인 군무원 출신 중에는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한인도 있다. 양칠성이다. 그는 일본군 소속 포로 감시원이었으며,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했다. 그는 3년가량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에 참여했고 포로로 잡혀 총살당했다. 그는 1975년 독립영웅으로 추대돼 자카르타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를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빛'이라는 의미의 '코마루딘(Komarudin)'이라고 부른다.

1960대부터는 한국 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시작됐다. 대표적 회사는 한국 해외 투자 1호 기업인 '코데코(한국남방개발)'다. 코데코는 1968년 2월 한국 정부로부터 300만달러의 해외 투자를 허가받았다. 그리고 3월 코데코와 한국 산림청은 보르네오섬 칼리만탄에서 임상조사를 마치고, 25만㏊의 임지 허가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최종 협상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최계월 코데코 회장의 역할이 컸다. 그는 양국 정부 최고위층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사업을 성공시켰다. 최 회장은 또한 1979년 인도네시아산 원유를 한국에 들여오는 데 기여했다. 당시는 오일쇼크로 한국 원유 비축량이 바닥났던 시기였다. 그는 초대 한인회장을 역임했으며, 인니 한국학교 설립에 앞장서는 등 헌신적으로 한인사회의 초석을 다졌다.

코데코에 이어 현지 정착해 성공한 회사는 1969년 설립된 코린도다.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은 코린도를 목재에서 시작해 부동산 개발, 화학, 팜오일, 금융 등 연매출 1조원대의 인도네시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현지인 고용은 2만명이 넘는다.

승 회장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도 공헌을 했다. 1989년 자카르타에 한국국제학교를 설립했고, 1990년부터 23년간 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지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엔 '달러보내기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2002년 제1회 세계한상대회 때부터 대회에 참가해 오고 있다. 올해 초에는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양국의 투자·성장에 기여한 역할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 밖에도 이호덕 로열수마트라그룹 회장, 송창근 KMK그룹 회장, 김우재 무궁화유통그룹 회장, 양영연 보성 회장, 신기엽 한인도 회장 등 수많은 한상이 인도네시아에서 코리아란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를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올해는 한·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이다. 인도네시아 동포와 한상 기업들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나갈 앞으로의 50년을 기대해본다.

[정승환 (재계·ESG)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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