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현장] "교실은 거들뿐, 경험이 진짜다"… 에리카캠퍼스의 강의혁명
참여한 기업·기관만 무려 822개
국내외 유수대학서 벤치마킹도
◆ 매경 포커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배운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저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걸 보면 그는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듀이. 아인슈타인보다 20년 전에 태어난 그는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확신했던 철학자였다. 이렇게 말했다. "학생은 스스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존재다. 진정 효과적인 교육은 지식을 일방적으로 외우게 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주고 이를 통해 학생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있다"고.
이런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를 배제하고 학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프로젝트형 교육이 탄생했다. 교육에 '경험'이란 코드를 심는다. 이른바 문제기반학습(PBL·Problem Based Learning).
1969년 캐나다의 맥매스터 의과대학을 효시로 많은 대학에서 이런 유의 교수법을 도입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미국 서부의 스탠퍼드대학과 동부의 올린공대. 스탠퍼드엔 그 유명한 D스쿨, 즉 디자인스쿨이 있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생각을 디자인하는 방법을 기르자는 것. 그게 디자인 싱킹(Thinking)이고 그 중심에 이곳에서 40년 넘게 기계공학을 가르친 래리 라이퍼 교수가 있다. 2002년 개교한, 전교생을 합해 총 380명에 불과한 미국 보스턴 인근의 올린공대는 소위 SCOPE(Senior CapstOne Program in Engineering)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이런 거다. 프로젝트에 참가할 기업을 모집한다. 연간 회비는 5만5000달러. 기업은 당장 급하지는 않지만 미래 가치가 높은 프로젝트를 올린공대에 제시하고 이 학교 학생들이 교수와 기업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푸는 방식.
한국이 이런 교육법을 모를 리가 없다. 해외 우수 사례 벤치마킹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실천은 잘 안 된다. 기껏해야 특정 전공 과목에서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정도다. 그런데 그걸 거의 모든 전공에 적용하는 국내 대학이 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양대 에리카캠퍼스다.
혁명의 불씨를 지핀 인물은 에리카캠퍼스의 산학협력단장을 지냈던 김우승 전 한양대 총장. "교육부에서 2016년에 추진한 프라임(PRIME·ProgRam for Industrial needs Matched Education) 사업에 에리카가 선정된 게 계기가 됐습니다. 산업 연계 교육을 기치로 내건 프라임 사업은 현장 교육을 강화하는 건 물론 교육과정의 혁신과 창의적인 교육모델 개발이 필수입니다. 에리카는 태생적으로 산업 연계가 강점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완전히 학교를 탈바꿈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6년 4개 교과목에 IC-PBL(Industry Coupled Project/Problem-Based Learning)을 처음으로 적용했습니다. PBL에 산업을 연계한 거지요. 프라임 사업을 통해 3년간 에리카는 총 400억원 가까운 사업비를 지원받았고 이게 대학 교육 혁신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산에서 시작한 혁명은 서울 본교까지 번져나갔습니다."
김 전 총장은 중요한 건 실천이라고 말한다. 구호는 누구나 외칠 수 있다. 시늉은 누구나 낼 수 있다. 현장에서 작동하는 액션을 도출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학교를 나가 사회에서 부닥치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주자. 그러기 위해 일단 전공과 연계된 기업 등 외부 기관과 소통하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문제를 풀고 그걸 아예 학점이 부여되는 정규 과목으로 하자. 교수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평가하게 하자. 기존의 PBL을 업그레이드한 모델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탄생한 게 IC-PBL입니다." 김 전 총장은 "생색내기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아예 플랫폼을 만들었다"며 "모든 전공 교과목 중에서 PBL이 적용 가능한 환경을 만든 게 차별 포인트"라고 설명한다.
플랫폼으로 만들었다는 데 대해 김병호 IC-PBL센터장은 지역 중소기업인 새솔다이아몬드 사례를 든다. "작년 말 새솔다이아몬드에서 우리 IC-PBL센터를 찾았습니다. 기업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문제를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함께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매년 60~70%의 원자재가 사용이 안 돼 보관되고 있는데, 그렇게 20년 이상 사용하지 못한 공업용 다이아몬드가 급증한 거죠. 이를 활용할 사업 아이템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를 에리카 경영학부의 전상길 교수가 '내가 학생들과 해보겠다'고 올 1학기 강좌로 개설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들어온 기업 및 기관이 822개입니다. 우리는 학교와 기업을 연결하는 허브입니다."
2017년 경영학부의 송유진 교수는 풀무원과 수업을 같이했다. 첫 과제물은 "중국 시장 진출에 가장 적합한 라면은 무엇일까"였다. 중국화된 소스를 섞어 상품을 구성하는 방안도 제시됐고 마파라면이란 신개념의 상품기획안도 나왔다. 그걸 풀무원 사업부에 넘겼다. 풀무원의 김태한 담당은 "비록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았고 기업도 배운 게 많았다"고 말한다.
2017년부터 3년간 진행된 강의는 코로나19로 잠정 중단됐다. 상황도 바뀌었다. 대중관계가 악화되고 풀무원으로서도 중국 시장에 대한 중요도가 현저히 축소됐다. 대신 한류 열풍을 타고 유럽에서 한국 음식문화에 대한 니즈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더욱 풀무원이 강조하는 비건 등 식물성 식단이 유럽인들의 입맛과 가치에 부합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때마침 에리카에는 중국 대신 유럽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많았다.
송 교수는 유럽 교환학생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강의 모델을 구상하고 김 담당과 접촉 후 작년 초 IC-PBL 강좌를 설계한다. 이번엔 풀무원의 유럽 진출에 대한 과목이었다. 문제는 "유럽 국가 중 어디에 진출하는 것이 적합한가"였다. 김 담당은 "직접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학생들로부터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시장에 대한 값진 분석을 얻었다"며 "덤으로 네덜란드에 수출하려고 개발한 비건 라면에 대한 평가도 받았다"고 말한다.
에리카캠퍼스의 대표적 IC-PBL 전도사는 전자공학부의 이병주 교수.
"IC-PBL은 교수들에게 부담이 큽니다. 그럼에도 이런 교육을 해야 하는 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학에서 30년 동안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세월보다도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힘을 다해 운영한 수업이 바로 IC-PBL이었습니다."
그는 2019년 12월 학회에서 이스라엘 로봇개발사가 출시한 테미로봇을 처음 접한다. 인공지능(AI), 내비게이션, 휴대폰의 기능을 탑재한 로봇이었다. 이 교수는 방학 내내 이 로봇에 대해 스터디를 하고 다음해 학부 4학년에 개설된 로봇공학과목에 IC-PBL식 강좌를 연 것이다. 얼마 전 AI 자율주행 로봇 휠체어 기술 개발에 성공해 헬스케어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휴림로봇이 이 수업에 들어왔다. 수업명은 ITC 융합로봇공학.
이 수업에 참가한 전자공학부 윤영로 학생의 말이다. "6명이 한 팀을 이뤄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보안을 유지하고 서로 통신하며 이동하는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로봇 뒤에 일종의 서랍 같은 걸 만들어 배송하는 시스템도 구축했습니다. 이를 위해 팀원 6명은 각각 하드웨어 부문에서 △3D프린팅 △회로 △센서,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기계제어 △키오스크 인터페이스 △통신 등으로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서로 협업하면서 작품을 완성하니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앞으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IC-PBL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교수는 "기업 관계자가 참여하고 그들과 문제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며 평가는 더더욱 복잡하다"면서 "일반 강의에 비하면 몇 배의 수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거 수업을 마치면 이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듣는 인사말은 "잘 배웠습니다"였다. 지금은 바뀌었다. "교수님 재미있었습니다"라고. 그 말에 보람을 느낀다는 이 교수다. 에리카캠퍼스의 이한승 부총장은 "교수뿐만 아니라 학교 행정도 품을 팔아야 한다"며 "이를 교육 플랫폼으로 만든다는 건 행정이 여기에 '올인'했다는 얘기"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IC-PBL은 한양대의 브랜드가 됐다.
공대나 경영학부는 사실 IC-PBL을 적용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늘 수업이 기업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 인문대는 다르다. 한양대는 인문대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국제문화대학장을 맡고 있는 박기수 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 그는 K드라마의 성공 비결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엔터테인먼트 기업들과 함께했다. 애플TV가 '파친코'란 작품을 선택한 배경과 당시 상황을 분석해 향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드라마의 요건을 파악하기도 하고 '미스터 선샤인'의 인기 요소를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강좌가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단행본을 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부 2학년생인 나누리 씨는 "흥미진진한 수업에 몰입도가 높았다"고 평가하면서 "제작사 관계자들과 같이 공부하는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산업경영공학과의 강창욱 교수는 작년 IC-PBL 수업을 받은 제자 김규연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수업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인턴 실습을 하고 전환 면접도 통과해 신입사원이 됐다는 소식과 함께 교수님의 수업과 동기들과의 협업이 큰 도움이 됐다는 감사 편지였다.
한양대는 이렇게 개발한 학습법을 'IC-PBL 연결과 나눔(Connect & Share) 프로젝트'라 이름 지었다. 이 프로젝트가 작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지속가능발전교육 프로젝트로 인증받았다. 김 전 총장은 "유네스코가 IC-PBL을 한국형 혁신 교육모델로 인정한 것"이라며 "3년간 유네스코는 에리카의 IC-PBL을 세계 각국에 모범 교육 사례로 소개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 전 총장은 "교육 혁신은 세 분야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교육 내용, 교육 방법, 교육 환경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교육 환경은 어찌 보면 돈만 넣으면 되지만,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의 혁신은 교수의 실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에리카는 2016년 가을 4과목으로 아주 작게 시작했다. 그러던 게 지금은 한 학기에 254개 강좌가 IC-PBL이다. 누적으론 1952개 강좌. 공과대학은 물론 언론정보대학, 예체능대학까지 총 9개 단과대학이 모두 참여한다. 총 강좌의 30%가 IC-PBL이라면 다른 대학에선 혀를 내두른다. 그래서 에리카의 IC-PBL을 배우겠다는 대학, 기업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홈페이지에 들어와 자료를 다운로드한 건수는 총 2만9026건. 278개의 국내 대학이 벤치마킹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는 물론 KAIST까지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23개 유수의 해외 대학에서도 곁눈질했다. 삼성, SK, LG, 롯데 등 229개 기업과 기관도 관심을 보였다. 이기정 한양대 총장은 "이 정도면 혁명의 불씨가 퍼져나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이제 산업체를 넘어 사회 전반의 문제 해결로까지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캐치프레이즈 그대로 교실에서 사회로(Class to Society)다.
1970년대 서울에 흩어져 있던 공장들을 서남 방향으로 30㎞ 떨어진 안산시 단원구에 모았다. 그게 지금의 반월공단. 바로 옆에 붙은 시화단지와 함께 2만여 개 기업에서 25만명 이상을 고용하는 우리나라 뿌리산업의 본산이다. 대한민국 유일의 산업역사박물관이 소재한 곳도 이곳 안산이다. 한양대 에리카캠퍼스는 이 국가 산업단지의 배후 거점 대학으로 1979년 출범했다. 당시 기계공학과 500명, 전자공학과 200명, 전기공학과 100명, 총 800명 정원으로. 김 전 총장은 "그렇게 시작한 대학이 이제 전국 10위권, 산학연 협력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는 건 기적"이라며 "그 중심에 IC-PBL이 있다"고 단언한다.
IC-PBL
'Industry Coupled-Problem Based Learning'의 약자로 산업체, 지역사회, 대학의 연계를 통해 학습자가 현장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한양대 에리카의 교육모델.
사람과 현장은…
머리보다는 가슴, 가슴보다는 발로 쓰는 글을 좋아한다. 경제기사가 따분한 이유는 발로 쓰지 않고 머리로 써서 그렇다. 발품을 팔아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니다 보면 글이 나온다.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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