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에 ‘역사’ 팔고, 바이든에 ‘평화’ 팔고…외교 없는 1년

한겨레 2023. 5. 7. 14: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21] 윤석열 정부 1년 외교·안보
잃은 것은 역사와 평화, 얻은 것은 낡은 이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역사’를 팔고, 한-미 정상회담에선 ‘평화’를 팔았다. 그래서 무엇을 얻었나? 잃은 것은 이익이고, 얻은 것은 ‘낡은 이념’뿐이다. 세계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모든 국가는 변화하는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익’을 추구한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념을 선택한 윤석열 정부의 취임 1년, 무엇이 문제일까?

이익의 시대에 이념을 추구

윤석열 정부의 외교는 한·미·일 삼각협력뿐이다. 한-일 관계에서 역사문제를 양보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전환하고, 군사 분야에서 한·미·일 삼각협력을 강화했다. 당연히 노태우 정부 이후 지난 30년 동안 유지해온 북방정책의 시대가 끝났다. 물론 그렇다고 남방정책의 의지와 전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북관계 악화, 미-중 전략 경쟁,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북방과의 관계가 좋을 리는 없다. 그러나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 대결은 이제 시작이고, 장기적이며, 그래서 상당 기간의 과도기적 전환을 거쳐야 한다. 미국조차 첨단 분야에서 중국과 경쟁하면서도, 소비재 분야 ‘생산 거점’으로서의 중국 역할을 인정한다. 일본도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추종하지만, 천연가스 수입 같은 국익을 포기하지 않는다.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국가가 미-중 경쟁을 국익 관점에서 접근하고, 유연하게 대응한다.

윤석열 정부는 너무 빨리 양자택일을 선택했다. 미국도 일본도 이익 손실을 최소화하며 경쟁에 나서고, 수많은 완충국가도 국익을 앞세워 유연성을 발휘하는데, 한국만 너무 빨리 한쪽을 선택했다. 현재의 정세가 역세계화로 나아가지만, 세계화의 얽히고설킨 상호 의존관계 역시 엄연한 현실인데,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포기했다.

먼저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 코로나19 방역이나 중국 경제의 침체 때문에 생긴 일시적 무역 적자는 상황이 변하면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한-중 양국의 분업이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정치·외교적 관계 악화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매우 어둡다. 당연히 미국과 일본이 한-중 관계의 악화를 메워주지 않을 것이며, 그럴 만한 분업 구조도 아니고, 그렇게 할 형편도 아니다.

먼저 양보해도 시혜 베풀지 않아

동맹관계도 이익이 조화돼야 지속할 수 있다. 현재의 미국은 과거 냉전 시대, 자유 진영의 맏형 노릇을 하던 미국이 더 이상 아니다.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서 양보하지 않고, 원전 수출 분야에서도 한국의 양보를 요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3년 4월26일(현지시각) 한-미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취임 이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1천억달러 이상 투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얻은 이익을 재선 출마의 명분으로 삼았다. 공급망의 안보화로 정치와 경제가 분리하지 않는 현실에서, 한국 기업의 정치 위험성이 높아졌다.

한·미·일 삼각협력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까?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일본의 역할을 치켜세우는 이유는 안보 비용 분담 때문이고, 일본은 이를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 기회로 활용한다. 미국이 왜 한국의 한-일 화해 노력을 높이 평가하겠는가?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구상하는 한·미·일 삼각관계에서 한-일 관계는 언제나 갈등관계였다. 역사문제로 갈등할 때마다 중재자로 나선 미국은 언제나 양보하는 쪽의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다.

국민 다수의 비판에도, 외교부의 신중한 접근에도, 한국의 과거 역대 정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양보를 한 윤석열 정부를 당연히 미국은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일본 기시다 후미오 정부도 한국의 양보를 지지율을 올리는 기회로 활용했다. 미국도 일본도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먼저 양보한다고 해서 나중에 시혜를 베풀지 않는다. 양보하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레이건은 왜 소련과 협상에 나섰나

‘워싱턴 선언’에서 한국은 확장억제를 위한 협의체와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정례적 전개)을 얻었다. 미국은 비확산조약(NPT)과 한-미 원자력 협정 준수를 명시해, 한국 내부의 핵개발 여론에 쐐기를 박았다. 여기서 윤석열 정부가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부 보수세력과 특정 정부 관계자가 주장한 ‘핵공유’는 얻지 못했다. ‘사실상의 핵공유’도 사실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정상회담 직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의 담당 국장이 한국 특파원들을 불러서 이번 합의가 “‘사실상의 핵공유’라고 보지 않는다”고 했을까? 유례없는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원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공유는 한반도에서 실현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유럽은 전술핵이 있는 상태이기에 ‘핵공유’라는 개념이 성립하지만, 한반도에는 전술핵을 재배치할 계획 자체가 없다. ‘없는 핵’을 어떻게 공유한다는 말인가? 당연히 실질적이든 사실상이든 ‘핵공유’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핵공유’ 개념을 얻어내기 위해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 핵우산을 의미하는 ‘확장억제’도 마찬가지다. 한-미 동맹을 유지하는 한, 확장억제 공약은 유효하다. 추가로 협의체를 만들 이유도 없다. 북한의 핵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은 한·미 양국의 작전계획에 포함됐고, 북한의 핵능력에 따라 수정 발전하고 있으며, 이미 한-미 군사훈련에서도 반영하고 있다. 앞으로 지켜보면 알겠지만, 협의체는 보여주기 위해 열릴지 모르겠으나, 굳이 꼭 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전략자산 배치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미 조지 부시 행정부 때,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국외 미국 군사력의 효율화를 추구했다. 핵무기를 탑재한 전투기나 항공모함, 그리고 잠수함을 한반도에 묶어둘 수 없다. 한반도 근처로 오는 경우는 정해져 있다. 연합군사훈련을 하거나, 한반도 주변 지역과 작전 범위가 연계될 때 온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점은 미국 전략자산의 사거리나 작전 범위는 북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다. 그때마다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높아지고, 북·중·러의 대응 훈련으로 이어지며, 그만큼 안보 비용을 치러야 한다.

핵전쟁에 대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정부의 책무는 당연히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화와 협상을 ‘겁쟁이들이나 쓰는 단어’로 여겼던 냉전의 전사,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을 바꿔 소련과의 협상에 나섰는지를 소개하고 싶다. 1983년 11월20일,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은 핵전쟁을 다룬 <그날 이후>라는 영화를 방영했다. 핵전쟁의 참상을 다룬 이 영화를 본 1억 명 중 한 명이 바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그는 충격받고 관련 부처에 핵전쟁 시나리오를 보고하라고 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을 알고 그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핵무기 통제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소련과의 협상에 나서 냉전 종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맡길 수 없이, 대통령이 해야 하는 외교

외교는 대통령이 한다. 다른 분야는 전문가를 발탁해서 맡기면 되지만, 외교는 그럴 수 없다. 한국 외교의 ‘대통령 리스크’가 심각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첫 번째 문제는 ‘외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이 북한을 비판하면서도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 말하거나, 중국을 비판하면서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빼놓지 않는 이유가 있다. 외교는 전쟁이 아니고, 대결하더라도 서로 협력해야 할 여지를 남겨놓기 위해서다. 대통령의 말이 거칠수록, 후속 조치를 해야 하는 외교 실무자는 그만큼 힘들어진다.

둘째, 정세 관리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핵 문제의 해결이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남북관계 또한 쉽게 풀리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해결이 어려워도 대통령은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정세가 악화하면 우리는 북한보다 더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미얀마) ‘아웅산 사태’에도 북한과 대화에 나선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과도한 이념에 빠져 있다. 핵공유 사례처럼 보수언론이 바람을 잡고, 정부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념’을 협상의 우선순위로 삼아, 실질적으로 얻어야 할 국익을 포기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정책 결정 과정의 권위주의적 특성으로, 공무원의 기능적 역할도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의 구호를 대면하는 현실이 섬뜩하다. 장기적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믿지만, 그때까지의 국격 추락이 너무나 안타깝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