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미나 남달랐던 정민철 “‘3대 500’보다 꾸준한 걷기와 근력 운동이 중요”[이헌재의 인생홈런]

이헌재 기자 2023. 5. 7. 12: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러닝을 하는 정민철. 많은 러닝을 통해 하체를 키웠다. 한화 제공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선수는 왼손 투수 송진우(57)다. 1989년부터 2009년까지 한화 이글스에서만 뛰며 210승을 거뒀다. KBO리그 유일의 200승 투수다.

그렇다면 오른손 투수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는 누구일까. 주인공은 정민철 전 한화 단장(51)이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이글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393경기에 등판해 161승을 수확했다. 입단 첫해인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뒀고, 1999년에는 18승을 올리며 한화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다. 2000년부터 2년간은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시절 완봉승을 거둔 뒤 히어로 인터뷰를 하는 정민철(왼쪽). 동아일보 DB
전성기 시절 정민철의 직구는 대한민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속 140km대 후반으로 빠르기도 했지만 공 끝에 힘이 넘쳤다. 한국 최고의 포수로 평가받던 박경완이 “내가 받아 본 최고의 직구는 정민철의 직구”라고 했고, 역시 한국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던 이종범도 “내가 경험한 최고의 직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정민철의 진정한 가치는 스태미나라고 할 수 있다. 정민철은 마운드에 올라가면 잘 내려오지 않는 투수였다. 특히 일본에 진출하기 전 그는 완투와 완봉을 밥 먹듯이 했다.

프로 데뷔 첫해였던 1992년 11번 완투를 시작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모두 61경기나 완투했다. 완봉승도 무려 20번이나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시절 그는 제대로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도 2번의 완투와 1번의 완봉승을 챙겼다.

그는 또 무려 4차례(1994, 1996, 1997, 1999년)나 한 시즌 200이닝 이상을 던진 철완이기도 했다. 팀당 한 시즌에 144경기를 치르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팀당 126경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3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때 이종범 위원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정민철 위원. 동아일보 DB
2009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 그는 지도자와 방송사 해설위원을 거쳐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한화의 단장직을 수행했다. 올해부터는 다시 MBC스포츠플러스에서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출범한 KBO 전력강화위원회 위원직도 맡고 있다.

일의 특성상 요즘 그는 유니폼이나 야구 점퍼 대신 수트를 많이 입는데 그는 여전히 깔끔한 옷맵시를 자랑한다. 탄탄한 몸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이다.

정민철이 실천하는 건강 지키기의 기본은 ‘걷기’와 ‘타기’다. 그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에 사는 그는 한강 변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한 번 걸을 때 2시간 내외로 대개 10km를 정도를 걷는다. 그는 “운동화 신고 나가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일단 나오면 ‘정말 잘 나왔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2시간 걷는 게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한화 단장을 할 때는 고민이 너무 많아 훨씬 많이 걸었다”며 웃었다.

그는 자전거도 즐긴다. 산악자전거(MTB)를 타고 서울 주변으로 70~80km씩 라이딩을 한다. 그룹을 따로 만들어서 하는 건 아니고 주로 혼자서 탄다. 그는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전거로 맛집을 찾아간다. 예들 들어 경기도 일산에 맛있는 냉면집이 있다고 하면 그곳을 목표로 정해 자전거를 타고 가서 먹고 돌아오는 식이다. 그렇게 서울은 물론이고 인천, 경기 지역까지 많이 다녔다”고 했다.

정민철 전 단장은 요즘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근력을 키우고 있다. 정민철 제공
50대에 접어든 후 그는 근력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40대까지 주로 유산소 운동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반반 정도 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본격적으로 근력 운동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3대 500(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중량을 합쳐 500kg의 무게를 드는 것)’ 같은 걸 목표로 잡는 건 아니다. 내 몸에 맞춰 조금씩 중량을 늘려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그는 데드리프트로 세 자릿수를 돌파했다. 이전까지 80kg정도를 운동을 하다가 최근부터는 100kg대를 들어 올린 것. 정민철은 “80kg 무게로는 10회씩 3세트를 한다. 그런데 110kg 무게를 끼우면 3번 정도 들어 올릴 수 있다. 흔한 말로 용을 써야 하는데 그럴 때 운동이 많이 된다”고 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일주일에 3회는 피트니스센터에서 가서 근력 운동을 한다. 야구 중계 등으로 지방 출장을 갈 때는 꼭 밴딩을 챙겨서 간다. 숙소에서 틈틈이 고무줄을 당기며 어깨를 강화하고, 맨몸 스쿼트를 통해 하체도 단련한다.

1999년 한화의 유일한 우승을 이끈 정민철. 동아일보 DB
음식 조절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밀가루 음식을 최대한 멀리하고 국물과 튀김 요리도 잘 먹지 않는다. 그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술자리는 가끔씩 한다. 다만 술자리가 예정된 날에는 그날 점심부터 먹는 것을 조절하는 편”이라고 했다.

선수 시절 그의 몸무게는 80kg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관리를 안 하면 쉽게 세 자릿수 몸무게가 된다. 정민철은 “살이 금방 찌는 체질이라 관리를 꾸준히 해 줘야 한다. 어릴 때 그렇게 좋아하던 라면도 지금은 아주 가끔 먹는다. 너무 좋아해서 포기할 순 없으니까 열심히 운동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1년에 1~2번 맛있게 먹는다”고 했다.

정민철은 선수 시절 잘생긴 외모로 ‘꽃미남’으로 불렸다. 언변이 좋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팬서비스도 훌륭해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받았다.

정민철은 “지금도 이렇게 꾸준히 건강 관리를 하는 것은 팬들에게, 또 시청자들에게 계속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그는 “현재는 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운동을 조금만 게을리해도 머리 속에 떠오른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애드립도 잘 안 나온다”며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할 때는 하루에 8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버텨내려면 체력이 관건이다. 결국 운동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