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챗GPT' 때문에 번역가 위기라고요? '스즈메' 번역가가 직접 답했다
챗GPT 시대 번역가의 역할을 묻다
인공지능이 창작의 영역을 내다볼 가능성을 엿보이자 문화 예술계가 일렁이고 있다. AI가 생성한 그림이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거나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곤 하는 것은 이제 놀랍지 않다. 이번엔 직접 시도 쓰고 시나리오도 쓴다는 ‘챗GPT’가 화제다. 복잡한 질문이나 이미지 또는 파일을 입력해도 내용을 곧잘 이해하고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답을 내놓는 편리함이 수많은 이들을 인공지능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중 번역은 언어를 재료로 삼는 여러 일들 중 언뜻 기계로 작동시키기가 간편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인공지능의 등장을 둘러싸고 번역의 미래를 헤아리는 목소리가 분분하다. 실제 지난 2월에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하는 번역신인상 공모 대회에서 웹툰 부문 신인상을 받은 한 외국인이 AI 번역기를 보조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번역원은 공모 취지에 맞게 'AI 등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은 자력의 번역'으로 규정을 명확히 하기로 했다.
영화 속 말들을 옮기는 영화 번역가라면 어떨까. 서울경제스타는 영화 ‘러브레터’, ‘소나티네’ 등 오래도록 명작으로 회자되는 작품부터, 최근의 흥행작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25년 여가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영화를 번역해 온 강민하 번역가와 함께 관련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
-업계에서 ‘챗GPT’ 등장이 화제인데, AI 번역의 혁신을 체감하시는지.
“고백하자면, 딱히 관심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번역이 영화잖아요. 어떤 물건의 사용 설명서나 딱딱한 조항이 적힌 계약서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움직이고 표정을 짓는 영화 말이에요. 만약 제가 번역해야 하는 게 문서나 기록 장부 같은 딱딱한 글이었다면 요즘 유행하는 AI 챗봇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생각해 봤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제가 번역하는 텍스트가 영화라는 사실에 집중해요. 자막은 대부분 대사로 구성되고, 대사 안에는 사람의 감정이 들어가 있어요. 말은 상황에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달라지잖아요. 배경에 따라, 말하는 사람에 따라, 사건에 따라 달라지는 예술적인 문장들을 모두 살아 있는 문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뾰족하게 AI를 활용해서 더 나은 번역을 해야겠다거나 몰랐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대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AI를 활용할 마음은 없지만, 기계 번역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하신 것 같다.
“번역을 하는 AI가 아마 사전상 등록된 데이터베이스(DB)에 기반해서 작동하리라 예상해요. 통계적으로 가장 많이들 사용한 단어를 선정해서 내놓는 거죠. 이렇게 사전에 기초한 시스템이 가지는 한계는 바로 유동성이라고 생각해요. 시대가 흘러 뜻이 변했거나 때에 따라 더 자주 쓰이는 의미가 따로 있는 경우에는 번역기가 추천하는 뜻과 간극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언어의 뜻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체감한 순간은?
“오래전 일이지만 ‘러브레터’(1999, 이와이 슌지 감독)의 주인공이 눈밭에서 ‘오겐키데스카(おげんきですか)’라고 외치던 장면을 번역할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그 한 마디를 어떻게 번역할지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당시에만 해도 ‘오겐키데스카’하면 그저 우리말로 ‘안녕하십니까’나 ‘건강하신가요’ 정도로 번역을 많이 했었는데, 영화 속 맥락을 생각해 ‘잘 지내십니까’라고 번역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는 인사말도 아니고 영화의 설정상 죽은 사람에게, 그분이 연상되는 산을 바라보면서 외치는 상황이잖아요. 당시에는 굉장히 오래 고민한 끝에 나온 번역이었어요.
그런데 요새 제가 대학교 특강을 나가서 일본어를 하시거나 번역하시는 분들을 만나보면 ‘오겐키데스카’를 ‘잘 지내십니까’라고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신기했어요.”
-이제는 ‘오겐키데스카’를 AI번역기에 입력하면 ‘잘 지내십니까’가 우선 제안되기도 한다.
“제가 신기하다는 게 바로 이런 부분이에요. 제가 ‘잘 지내십니까’라는 말을 창작한 건 아니잖아요. 원래 우리말로 있는 문장이었고, 저는 일본어 대사의 번역으로 그 말을 골랐을 뿐이에요. 이제 번역기가 먼저 추천해 준다는 건 그만큼 많이들 쓴다는 뜻이겠죠. 결국 말이라는 건 몹시 유동적이라고 느껴요.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영화에서 또 ‘오겐키데스카’라는 인사가 나올 때마다 매번 ‘잘 지내십니까’라고만 번역하진 않거든요.(웃음) 때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쓰는 말이니까요.”
-어떤 번역이 잘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참 어려운 질문인데요, 이런 예시를 들고 싶어요. 어릴 때 했던 놀이 중에 귓속말 놀이라고 있잖아요. 여러 사람들이 일렬로 쭉 선 다음, 맨 끝에 있는 사람이 귓속말로 그 옆 사람에게 어떤 문장을 전달하고 전달해서 마지막 사람에게 말하는 놀이요. 마지막 사람은 처음 문장을 어떤 걸로 받아들였는지 알아보는 그런 게임과도 같은 게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번역은 우리 말에 맞게 변형시켜 전하는 작업이잖아요. 변형 과정에서 제가 여러 차례 작업을 할 때도 있고 한두 차례만에 완성이 되는 문장도 있어요. 그 과정을 거치며 처음 받은 일어 문장에서 시작해 우리말로 읽기에 얼마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가 통하는지가 제가 생각하는 잘한 번역의 기준이에요.
정리하자면, 이해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원래 그 작품이 얘기하고자 하는 그 느낌, 감각들을 모두 전달한다면 가장 좋은 영화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번역을 위해 경계하는 자세가 있다면.
“제가 주로 작품을 맡는 일본어의 경우 일본에 유학을 오래 갔다 오시거나 이른 나이부터 일본 문화에 심취해 계신 분들은 본인이 하는 말 중에 한국어로서는 어색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일본식으로 번역을 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결과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저는 번역이 결국 독자를 생각하는 작업이라고 여기거든요.
번역의 의의가 우리말로 생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말로 읽었을 때 걸리는 부분이 없는지 따지는 일이 첫 번째라고 생각해요. 멋있는 어휘나 문장을 구사하려는 것보다도 어색하지 않게 맛이 있는 말로 만들어내는 게 중요해요. 전달자인 번역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게 아니라 전달의 대상인 작품과 이를 전달받는 관객을 중심으로 이루어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노력합니다.”
-일본어만의 언어적 특징은 어떻게 대처하나.
“일본은 경어 표현과 완료형 표현이 발달해 있어요. 경어 표현에서는 기본적으로 본인을 낮추기도, 상대를 몹시 높이기도 하는데요. 가령 '제가 할게요'라는 뜻의 말을 할 때 '감히 제가 저에게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요. '시마스(します)'라는 말은 한국어로 '합니다', ‘하겠습니다’인데요. 일본 언어 습관에서는 이를 그냥 말하지 않고 ‘사세테이타다키마스(させていただきます)’라고, 한국 뜻으로 '일하는 것을 감히 제가 받겠습니다' 이런 식이죠. 당연히 그대로 옮기면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겸양어를 생략하거나 변주해요.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로 다듬는 거죠.
또 다른 큰 특징은 우리말에서 그냥 “-했어”, “-하게 됐어”라고 말하는 문장들을 일어에서는 “-하고 말았어”, “-해버리게 됐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잦다는 거예요. 이 경우에 영화의 맥락상 정말 후회의 의미가 있거나 ‘뜻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어’라는 의미라면 ‘-해 버렸다’라는 어미를 살리기도 해요. 하지만 내용에서의 의미가 없이 습관적인 표현이라면 최대한 덜어냅니다. 이렇게 원래 대사의 느낌을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재차 드리네요.”
-‘스즈메의 문단속’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장 공들였던 장면을 꼽자면.
“극 중 소타가 외는 주문이 가장 어려웠어요. 처음에 딱 이 영화를 받았을 때 주문 부분을 보고서 ‘와, 이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특정 종교의 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해진 의식을 지낼 때 나오는 표현만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요. 오로지 영화의 설정 하에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주문이잖아요. 일본 사람들은 알 법한 의식에 관련된 말이 일부 들어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이 봤을 때도 이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고민했어요.”
かけまくもかしこき日不見ひみずの神かみよ。(아뢰옵기에도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시여.)
遠とおつ御祖みおやの産土うぶすなよ。(머나먼 선조의 고향 땅이여.)
久ひさしく?領はいりょうつかまつったこの山河やまかわ、(오래도록 배령받은 산과 하천을,)
かしこみかしこみ、謹つつしんでお返かえし申もうす。(삼가 돌려드리옵나이다.)
“관객들이 ‘정말로 신성하고 거대한 존재에게 바치는 말이로구나’하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번역하려고 노력했어요. ‘아뢰다’, ‘송구하다’ 이런 단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 쓰잖아요. 여기서는 일부러 넣었어요. 애초에 우리가 편히 쓰는 말을 쓰는 장면이 아니니까요. 평소에 내가 하는 일상적인 말과는 다른 인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말 많이 번역을 써봤죠. 주문 대사는 가장 힘들면서도 재밌었어요. 결과적으로 이 주문을 흉내 내서 관객분들께서 많이들 ‘밈’처럼 영상도 만들고 하시더라고요. 적절한 지점을 찾아 번역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지나치게 쉬웠으면 주문 같지 않아서 흉내 내는 재미가 덜했을 것이고, 또 너무 어려웠다면 아예 기억도 안 나서 따라 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세리자와의 스포츠카 문짝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실화냐’라는 번역이 재미있었다.
“세리자와의 실제 일어 대사는 ‘마지카(マジか)’라는 말이었어요. 구어적 성격이 강한 말이에요. 보통 인물이 어떤 상황을 믿을 수 없을 때 혼토(ほんと)’ 같은 말을 쓸 수도 있는데 해당 장면에서는 ‘마지카’라는 대사로 처리했어요. 이건 살아있는 우리의 일상 대화체라는 점이 강조된 거예요. 이 ‘마지카’를 그냥 착하게 번역하자면 ‘진짜야?’나 ‘정말이야?’가 될 수도 있지만 원래 일어 대사의 분위기와 세리자와라는 캐릭터의 성격상 촐싹거리는 느낌을 줘야 했어요.
사실은 원래 번역할 때 유행어를 잘 안 쓰려 해요. 유행어는 시대를 타기 마련인데, 시간이 흐르면 번역이 어색해 보일까 우려하거든요. 그런데 저 대사를 뱉는 상황은 순간적으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서, 원래의 황당한 재미를 살리기 위해서 써버렸어요.”
-간판이나 책 표지 등 대사로 나오지 않는 요소도 일부 번역을 했다.
“풍경 곳곳에서 보이는 글씨나 문구 같은 건 받은 대본에도 적혀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특히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 더더욱 화면 구석구석에 배치된 정보가 의도된 바가 많을 텐데, 그런 것들 중 번역이 필요한 요소가 있는지 따져봐요. 필요 없는 글귀까지 전부 써넣을 필요는 없지만 내용 이해에 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하면 모두 번역합니다. 그런 때에는 원래 일본에서 받은 대본에 없어도 설명을 추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죠.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의 방에 처음에 지진이 나고 소타가 그 방에 올라갔을 때 지진 때문에 방의 물건들이 흩어져 있는 배경이 보여요. 이때 소타가 의자를 딱 바라보는 시점에서 방 안에서 두 권의 책이 명확하게 보이거든요. 하나는 트루게네프의 ‘첫사랑’이고 또 하나는 ‘간호사가 되려면’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일본인들이 그 장면을 보면 이 제목들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그 두 권의 제목이 크게 그려져 있어서 정보를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책이 의자 옆에 놓인 채로 클로즈업 장면에서 보일 때 ‘이거는 넣어야 되겠구나’라고 판단했어요.”
-AI 번역으로는 이와 같은 장치들을 살리기 힘들 수도 있겠다.
“이야기에서 의도한 바가 뒷배경과 소품에 적힌 문구로 들어가 있을 때가 많아요.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일본인이 봤을 때 눈에 띌 정도의 글씨라면 가능한 한 번역을 한 다음 꼭 넣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점에서 다시 AI 이야기로 돌아가는데, 인공지능이 이런 복선과 같은 장치들을 판단해서 처리하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원본에서 살짝만 드러내는 숨겨둔 정보라면 번역에서도 그 숨겨둔 느낌을 살려서 은은하게 옮겨내는 섬세함이 중요한 일이니까요.”
-복선과 은유 같은 연출적인 요소를 꼼꼼히 보신다. AI 시대에 대응하는 번역가의 무기 같이 느껴지는데.
“대응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한 게, 저는 인간이 AI와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든지 적대시해야 한다든지에 관해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도 의료나 과학 등 다양한 기술 발전 덕을 보고 있고, 앞으로의 기술이 더욱 발전하겠지만 어쨌든 각자의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 속 사람들의 오묘한 마음이나 이야기가 흐르며 피어나는 분위기 등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은 스스로 계속해서 키워나가는 거예요. 기계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가 아니라 그저 제가 향유하는 감정을 통해 텍스트를 읽어내면서요. 그러니까 이건 사람과 기계 중 누가 더 잘한다고 꼽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다르게 존재하는 거죠. 서로 다른 존재 의미를 가지고서요.
물론 지금의 ‘챗GPT’가 정말 놀랍다고는 느껴요. ‘이런 주제로 글을 써줘’라고 명령하면 새로운 글이 뚝딱 나오는 시스템 등장이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혁신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중요한 가치들을 지키며 번역을 해나가는 제 영역은 또 별개의 일이라고 느껴서 저는 제 할 일을 해나갈 뿐이랍니다.
조은빛 인턴기자 goodlight@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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