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를 관통하는 에르노의 소설 [여여한 독서]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1984Books 펴냄
아버지가 떠나고, 길고 충실한 애도 기간을 보낸 뒤 내겐 하나의 목표, 아니 바람이 생겼다. 아버지의 시대에 대해 쓰고 싶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시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미 충분한 애도를 한 터라 아버지에 대해 더 보탤 말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미 아버지가 쓴 책이 있었다.
아버지는 환갑 무렵부터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의 돈으로 공부하는 처지여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신이 쓴 글을 정서하는 일을 떠맡았다. 이면지에 쓴 글을 원고지에 옮겨드리면 아버지는 그걸 보고 고쳤다. 컴퓨터가 나온 뒤엔 원고지에 쓴 걸 다시 컴퓨터로 작업해서 수정했다. 그걸 거의 십 년 가까이 했다. 야단을 많이 맞았다. 나중에 편집 일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일찌감치 편집자 노릇을 했다는 걸 알았다. 아주 까다로운, 눈 높은 저자의 편집자 노릇을 나도 모르게 하면서 배운 게 있단 걸 알았다. 출판사에 다닐 때 아버지의 자서전을 책으로 만들어 팔순 생신 때 드렸다. 세상에서 가장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이 “애썼다, 고맙다” 하고 기꺼워하셨다. 우리가 서로를 기꺼워했던 그 기억이 흔들릴 때마다 힘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시대에 대해 쓰는 일은 어려웠다. 몇 년째 이런저런 궁리와 시도만 하면서 시간을 축내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가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각별하게 다가왔던 건 그래서였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 작가,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많다. 대개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글쓰기를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늘그막엔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처음엔 떠나야 했던 자신에 대해 쓰고, 마지막엔 돌아가고픈 자신에 대해 쓴다. 처음 이야기는 독자를 사로잡지만 나중 이야기는 맥이 빠지기 일쑤인데, 대부분 지난 시대를 그리는 철 지난 회고담이어서다. 당사자에게만 간절한 옛날이야기.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자전은 이런 회고담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그가 여든이 넘은 지금도 오래된 자기 이야기로 여전히 젊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리라.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가 죽고 얼마 뒤 작가가 그에 대해 쓰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란 사태를 겪은 자식이 일반적으로 쓰는 글과는 다르다. 에르노는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죽은 부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거나 아니면 지금의 자신을 내세워 그의 삶을 비웃는 일이 되기 일쑤인데.
이 어려운 일을 에르노는 해낸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자리〉를 읽고 또 읽는다. 어떻게 이렇게 해낼 수 있었는지 비결을 알고 싶어서. 비결은 아직 모르지만 이 짧은 소설이 주는 감동에 대해선 할 얘기가 있다. 100쪽이 조금 넘는 소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이것이 아버지라는 보통명사에 대해 이야기함과 동시에 ‘A…D…(묘비에 적힌 이름 약자)’라는 고유명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보통명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갖는 애틋한 감정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게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향수도 감동도 조롱도 없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려 애쓴다. 그의 삶이 가진 고유성은 그때 드러난다. 열두 살 때부터 남의 집 인부로 일하며 외양간에서 자고 벌레가 득실대는 상한 음식으로 배를 채워야 했던 아이. 공장 노동자로, 변두리 동네의 작은 가게 주인으로 평생을 일하며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남자. 그 삶을 ‘향수’도 ‘감동’도 ‘조롱’도 없이 기록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과 아버지의 거리를 명료하게 깨닫는다. 둘 사이의 거리가 부모와 자식이라는 입장의 차이나 세대의 차이 혹은 개인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닌, 사회와 계급의 산물임을 인식한다.
이제 죽은 부모에 대한 회한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시대, 역사, 그 역사 속의 삶에 대한 회한을 일깨운다. 여기엔 운명이나 시대 같은 거대서사에 지워지고 싶지 않다는 자식들의 욕망이 실제론 또 다른 낱낱의 삶을 지웠다는 회한이, 그 욕망을 갖게 한 것이 실은 아버지의 욕망이었음을 뒤늦게 마주한 자식의 회한이 있다. 에르노의 소설은 돌이킬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되풀이되는 이 회한을 직면하게 한다.
이 점에서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가의 전작 〈자본주의의 적〉을 재미있게 읽었고 그가 늦은 나이에 보여준 변신에 감탄하고 환호했던 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다. 작가의 필력은 무르익었고 소설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일지는 몰라도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자식의 해방일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식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해방이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빨치산 아버지의 삶을 긍정으로 추억하는 것은 자식에겐 통과의례이겠으나 그 역사에 대한 평가가 수반되지 않는 회고담은 한국 사회로 보면 시대착오다. ‘시적으로 꾸미지도 않고 현재에 취해 비웃지도 않는(임호경 번역 참조)’ 객관적 시선이, 미화와 조롱 사이에서 널뛰는 한국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자식인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내 개인적 추억과 별개로 당신이 역사적으로 점한 위치를 평가하는 능력은 자식인 나의 도리요 의무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