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불패’ 신화에 자리 잡은 전세...‘깡통전세’ 막을 방법 없을까

조해동 기자 2023. 5. 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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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인이 집 장만을 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돼 온 ‘전세 제도’가 인천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을 계기로 여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미국, 영국 등 해외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세 제도의 장·단점을 이번 기회에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전세사기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세, 오랫동안 한국인 집 장만의 ‘초석’ 역할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경제 개발이 시작된 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중산·서민층이 집 장만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전세였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고령층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전세는 보증금이 굳지만, 월세는 ‘막 삭는 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일부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직원 사택을 마련할 때 "월세는 안 되고, 반드시 전세로 해야 한다"는 명확한 지침을 직원에게 내리기도 한다.

이런 믿음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 사실이다. 전세는 주거 수단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막을 곰곰 살펴보면 일종의 금융 상품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래 전에는 전세 1억 원인 집의 월세는 연간 2000만 원인 시절이 있었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1억 원을 은행이나 금융회사에 넣어둔 뒤 실 수령할 수 있는 금액이 1000만 원이었다면, 월세를 내야 할 경우 2000만 원을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임차인에게 전세는 ‘유리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집주인들은 왜 당장 손에 들어오는 돈이 적은데도 전세를 선호했을까. 그 시절 집주인들이 집을 살 때 부족한 자금을 전세로 충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뒤 집주인은 월급 등을 착실히 모아 목돈을 만들어 자신의 집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빼주기 전에 더 크고, 좋은 집으로 빚을 내 이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전세는 임대인(집주인)과 임차인(세입자) 모두에게 필요한 제도였던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가정은 ‘집값과 전셋값은 계속 오른다’는 것이었다. 집값이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는 은행에서 빚을 내든, 전세를 주든 ‘집을 빨리 사는 것=돈을 빨리 버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부동산, 특히 서울 등 수도권 부동산 값은 그동안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예외적인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올랐고, 경제위기가 발생해도 위기가 지나가면 급격히 오른 것이 사실이었다. 전셋값도 극히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올랐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아직도 한국 경제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 부동산 불패 신화를 미국 등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으로 집값 뿐만 아니라 전셋값도 내려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소위 ‘깡통 전세’가 발생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세와 관련된 사기 행각까지 횡행하면서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 제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 모색할 때

현재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전세 사기 특별법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채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복잡한 내용이 많지만, 본질적으로 살펴보면 국토교통부 등 정부나 국민의힘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각종 지원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국가가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의 보증금을 직접 제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야당 측은 "피해자의 실질적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전세 보증금을 반환해 줄 수 있는 방안이나 그에 상응하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해외 선진국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제기되기 어렵다. 사인(私人) 간 거래에서 사기 행위가 발생했다고 해도, 그에 따른 피해를 국가가 국민 세금(재정)으로 보전해준다는 발상을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에서도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을 집행하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전세보증금을 보전해 준다면, 앞으로 모든 종류의 사기 피해를 본 사람들이 국가에 "피해를 보전해달라"고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의 전세보증금 보전을 해주기 어렵다는 정부·여당의 고충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당이나 야당이 모두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 ‘표(票)’를 잃기 싫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정부·여당도 야당의 주장에 쉽게 동의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경제도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중·장기 경제성장률은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낮아질 것이고, 집값이나 전셋값도 과거처럼 계속 오르기만 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앞으로도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정부가 이번 기회에 단기적인 대책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현재 금융회사에 예금을 입금하면 5000만 원까지만 정부가 지급을 보장한다.(예금부분보장제) 해당 금융회사가 파산하면 5000만 원을 초과하는 예금에 대해서는 예금자가 손해를 보도록 돼 있다. 대신 5000만 원까지의 예금을 보호하기 위해 금융회사 등이 ‘보험료’를 내고, 예금보험공사(KDIC)라는 기관이 이를 받고 국민의 예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금융에서 사용되는 예금부분보장제와 유사한 방안을 전세 제도에 도입할 수는 없을까. 예컨대 집주인이 전세를 놓을 때 의무적으로 일정 보험료를 부담하게 하고, 그 보험료로 임차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국가기관이 사전에 정한 금액 만큼을 돌려준 뒤 임대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법적 조치 등을 하는 방식이다.

꼭 이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이번 기회에 임차인이 전세보증금을 떼이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와 정책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해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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