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 갈등 파국 치닫나…‘의료 영역’ ‘계급고착’이 쟁점
대통령실은 ‘거부권행사 고심
간호법 제정을 둘러싸고 정치권은 물론 보건의료계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간호사들은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 공포를 요구하는 반면 의사·간호조무사 단체들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고 있다. 재의요구안은 오는 9일 또는 16일 국무회의에 상정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절충안’을 마련 중이다. 여당 입장에서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빈번하게 건의하는 데 대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 만큼 간호협회·민주당과 대화를 통해 법안 내용을 재조정해 본회의에서 통과시켜보겠다는 취지다.
▮ 보건의료현장 갈등 심화
간호법은 의료법에서 간호인력의 자격·업무 범위와 처우 개선을 따로 떼어낸 독자적인 법이다. 간호법 제정은 지난 2005년과 2019년에도 추진됐으나 무산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의사와 간호조무사단체의 반발에도 지난달 27일 여당의 표결 불참 속에 본회의 통과를 강행했다.
간호사들은 간호법 제정이 간호사단체의 최우선 추진 과제라고 주장한다. 1951년 제정된 의료법이 변화한 보건의료 환경과 간호사의 역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간호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고령 사회에 대비한 맞춤형 돌봄을 위해서 간호인력의 업무 범위와 처우가 체계적으로 규정되면 간호법이 ‘부모돌봄법’ 또는 ‘가족행복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호사의 근무환경과 처우가 열악하다는 문제의식도 간호법 제정 요구로 이어졌다.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안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간호사의 근무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13개 보건의료단체로 구성된 ‘보건복지의료연대’는 간호법 저지 공동행동에 나섰다. 의사, 간호조무사, 방사선사, 응급구조사, 임상병리사, 요양보호사 단체 등이 속해 있다. 이들은 간호법이 ‘간호사특례법’이라고 주장한다. 또 간호사들의 업무 영역이 확장돼 자신들의 영역이 잠식될까 우려하고 있다.
특히 간호법에 포함된 지역사회라는 단어가 쟁점 중 하나다. 간호법의 목적을 서술한 제1조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이라는 대목이 있다. 의사들은 향후 간호사들이 지역사회에서 단독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간호조무사들은 의료기관뿐 아니라 요양원 등 지역사회 시설에서도 간호조무사가 간호사 보조 업무를 수행하게 될 것을 우려한다. 응급구조사, 임상병리사 등도 간호사들이 의료기관 밖으로 영역을 넓혀 자신들의 고유 업무를 수행할 소지가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간호법에는 간호조무사의 자격이 ‘특성화고의 간호 관련 학과 졸업한 사람’, ‘고등학교 졸업자로 간호조무사양성소 교육을 이수한 사람’ 등으로 규정돼 있다. 간호조무사들은 학력 상한이 설정되면 전문대 간호조무과가 생기더라도 졸업 후 관련 학원을 다녀야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사이 ‘계급’을 고착화한다는 것이다.
▮ 대통령 ‘거부권 행사할까
보건복지부는 간호법 본회의 통과 전후로 의료현장의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간호조무사를 차별하는 법이라고도 표현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지난 4일 SBS 라디오와 채널A 뉴스에 연이어 출연해 거부권 건의 여부에 대해 “의료현장 갈등·혼란을 최소화하고 국민 생명·건강에 어떤 것이 더 합당할지 고민해서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조 장관은 간호법 제정안으로 실질적인 변화는 없이 의료 직역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재차 밝힌 뒤 “우려가 크다”고 강조했다.
간호법 제정안은 지난 4일 정부로 이송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안 이송 후 15일 이내에 공포하거나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의료연대는 오는 11일 2차 연가투쟁을 거쳐 17일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했다. 16일 국무회의를 지켜본 뒤 거부권 행사 없이 법안이 공포되면 총력 투쟁에 나선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법안이 국회에서 부결돼 폐기된다면 간호사들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어느 쪽이든 의료현장의 혼란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앞서 대통령실은 지난 4일 간호법 제정이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는지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공식적인 공약은 아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간호법 제정이 윤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간호협회 간담회에서 말한 공약이었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는 지적에 “지난 대선 과정에서 당시 윤 후보가 간호협회를 방문했을 때 ‘합리적으로 결정하겠다’ 정도의 답변을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어 “인터넷 사이트에 공약처럼 올라간 부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식으로 후보가 협회나 단체에 약속하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간호법 제정에 찬성하는 대한간호협회는 정부가 직역간 갈등을 부각하고 오히려 조장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간호협회는 “헌법상 공무원의 중립 의무를 준수하며 갈등을 중재해야 할 복지부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간호협회는 또 국민의힘이 논평을 통해 ‘간호법 제정은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 아니었다’고 밝힌 데 대해 반박 차원에서 지난해 1월 윤석열 후보, 국민의힘과의 간담회에서 나온 발언을 담은 영상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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