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가루쌀은 겉은 쌀인데 밀과 똑같다?

이웅 2023. 5. 7.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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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분 구조가 밀과 유사해 제분에 적합…가격은 비싸고 글루텐 없어
정부, 2026년까지 생산량 420배 늘려 수입 밀가루 10% 대체 목표
"국산 밀도 경쟁이 안되는데 가루쌀로?…현실성 떨어진다" 지적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양곡관리법 개정(쌀 시장격리 의무화)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면서 정부가 식량안보와 쌀 수급안정 대책으로 내세우는 '가루쌀(분질미·粉質米)'이 관심을 끈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K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가루쌀은 겉은 쌀인데 밀하고 똑같다"며 "1년에 200만t의 밀가루를 사다(수입해서) 먹는데 10%만 대체해도 20만t"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100㏊ 심었다가 금년에 2천㏊로 20배 늘어난다"며 "국내 유수 기업들이 전부 들어와서 제품, 레시피 개발을 하고 있는데 효과가 있다면 내년에는 20배 늘리면 4만㏊를 재배할 수 있다. 그러면 쌀 문제 진짜 해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일반 쌀보다 제분 비용이 싸고 생육기간이 짧은 가루쌀 품종을 보급해 쌀 가공산업을 활성화함으로써, 수입 밀 의존도를 낮춰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만성적인 쌀 과잉 공급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현 정부의 식량정책을 설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가루쌀이 수년 내 국내 쌀 가공산업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면 가루쌀은 실제로 수입 밀 대체를 낙관할 만큼 장점을 지닌 걸까?

쌀가루로 만든 빵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9 우리 쌀빵 기능경진대회'에서 관계자가 출품작을 심사하고 있다. 2019.11.21 jin90@yna.co.kr

일반 쌀(멥쌀)은 전분 구조가 치밀하고 물성이 단단해 제분기로 그냥 빻으면 전분이 손상돼 품질이 떨어진다. 쌀가루로 만들려면 물에 불린 뒤 빻는 '습식제분'을 해야 하는데 가공비용이 많이 든다. 쌀가루 100㎏를 생산하는데 대략 500ℓ의 쌀뜨물이 발생하고, 습식제분 된 쌀가루를 유통하려면 냉동보관, 살균, 건조 등 추가 공정이 필요하다.

반면 밀은 전분 구조가 둥글고 성글어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제분하기 쉽고 비용도 적게 든다. 비싼 제분 비용은 쌀가루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은 연구 끝에 기존 남일벼에서 작은 압력으로도 쉽게 분쇄되는 돌연변이 품종인 '수원542호'를 확보한 뒤 2019년 병에 강한 조평벼와 교배시켜 재배 안정성을 향상한 '바로미2'(특허출원명 가루미2)를 개발했다. 가루쌀로 불리는 이 신품종은 전분 구조가 밀과 비슷해 물에 불리지 않고 바로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 '건식제분'이 가능해 일반 쌀보다 가공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다.

가루쌀은 생육기간이 일반 벼보다 20~30일 정도 짧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일반 쌀은 보통 5월 중순~6월 중순 모내기를 하는데 가루쌀은 6월 하순~7월 초순 모내기가 가능해 밀, 보리 등과의 이모작이 용이하다.

현 정부는 이런 장점을 지닌 가루쌀을 활용해 식량안보(식량자급률 제고)와 쌀 수급균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농식품부는 윤석열 정부 출범 한 달만인 지난해 6월 발표한 '분질미를 활용한 쌀 가공산업 활성화 대책'을 통해 현재 연간 200만t 규모인 밀가루 수요의 10%를 가루쌀로 대체하기 위해 가루쌀 재배면적과 생산량을 2022년 100㏊·475t에서 2026년 4만2천㏊·20만t으로 420배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가루쌀 '바로미2'의 전분 구조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홈페이지 발췌]

정 장관이 '가루쌀은 겉은 쌀이지만 밀과 똑같다'고 언급한 건 전분 구조가 밀과 유사해 제분에 적합한 가루쌀의 장점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는 게 농식품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식품업계 등을 취재한 결과를 종합해 보면 가루쌀의 가곡적성이 밀에 가깝게 개선됐다고 하더라도 밀과는 여전히 두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선 가격이다. 전쟁 등의 영향으로 밀 수입 가격이 급등했지만 밀가루 가격은 여전히 쌀가루보다 훨씬 저렴하다.

농식품부에 문의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유통 밀가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입산 밀가루 소비자가격은 현재 1㎏당 2천원(작년 수입밀 평균 도입가격 577원/㎏) 내외지만, 국산 밀가루는 1㎏당 3천~4천원(작년 국산밀 평균 수매가격 975원/㎏), 일반 쌀가루는 1㎏당 4천~5천원대에서 거래되고 있다.

쌀가루를 만들 때 '습식제분' 비용은 1㎏당 600~1천200원이고 '건식제분' 비용은 1㎏당 200~300원이다. 따라서 건식제분이 가능한 가루쌀은 일반 쌀보다 1㎏당 300~1천원의 제분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최대로 반영해 가루쌀의 쌀가루 가격을 추산해 보면 대략 1㎏당 3천~4원천대인데, 그래도 수입산 밀가루(1㎏당 2천원 내외)와는 2배 이상 가격차가 날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픽] 전략작물 재배면적 확대 계획 (서울=연합뉴스) 김민지 기자 = 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쌀 수급안정, 직불제 확대 및 농업·농촌 발전방안'에 따르면 정부가 쌀값 안정화를 위해 벼 재배면적을 감축하고 논콩, 가루쌀 등의 전략작물 재배면적을 확대한다. minfo@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가격보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가루쌀도 일반 쌀처럼 밀에 풍부한 글루텐이 없다는 점이다. 글루텐은 빵을 부풀게 하고 빵과 면에 특유의 풍미와 쫄깃한 식감을 더하는 단백질이다. 카스텔라, 케이크, 쿠키 등 부풀지 않아도 되는 비발효 제품은 쌀가루로도 만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쌀가루에 글루텐 등 보완제를 첨가해야 한다. 반면 글루텐이 사람에 따라 알레르기나 소화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글루텐 프리'(Gluten Free) 시장이커지고 있어 정부는 이를 가루쌀 보급의 기회로 본다.

문제는 이 같은 차이를 극복하고 가루쌀로 수입 밀 10%를 대체하고 쌀 수급균형까지 달성하겠다는 정부 대책의 현실성이다.

농식품부는 가루쌀 생산단지 조성과 직불금 지원으로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마련하고 생산한 가루쌀을 공공비축미로 매입해 식품업계에 특별 공급하는 한편 경쟁력 있는 가공 제품들을 개발해 소비 기반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농식품부는 가루쌀 생산단지 39곳을 선정해 올해부터 가루쌀과 밀 등을 이모작하는 경우 ha당 250만원(가루쌀만 재배시 100만원)의 전략작물직불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농심, 삼양식품, SPC삼립, 풀무원, 해태제과 등 15개 식품업체를 선정해 라면, 빵, 스낵, 케이크 등 19개 가루쌀 제품 개발에 돌입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국정감사에선 정부 계획대로 가루쌀 20만t을 생산하는 데 2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또한 경쟁해야 할 수입 밀보다 원료비가 비싼 가루쌀 제품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게 하려면 원료 공급가격을 낮춰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 부담은 더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농식품부는 식품업체에 공급할 가루쌀의 공급가격은 올 하반기 정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더라도 예산 투입은 정부의 정책 의지에 달린 문제여서 가루쌀 증산 계획에 당장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쌀 가격 안정을 위한 쌀 시장격리 비용으로 연간 수천억원의 예산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면·케이크도 가루쌀로…식감 좋지만 문제는 가격 (CG) [연합뉴스TV 제공]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가루쌀 제품이 개발돼 나오더라도 바람대로 소비시장에 받아들여져 수입 밀 제품들을 대체할 수 있느냐다. 정부는 제품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국내 유수한 식품업체들이 참여하고 있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는 원료 생산과는 달리 정부의 강한 정책 의지만으로 성공을 장담하긴 어려워 보인다. 실제로 정부 발표 외에 식품업체들의 반응과 시장 현황, 과거 사례에 비춰보면 아직 기대보다는 우려가 큰 상황이다.

지난해 정부로부터 가루쌀을 제공받아 가공적성을 시험했던 식품업계의 평가가 국정감사 때 공개됐는데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당시 자료를 보면 대한제과협회는 글루텐을 첨가하지 않은 가루쌀은 팽창이 적어 제빵 가공에 부적합하다고 평가했고, SPC삼립은 가루쌀로 만든 카스텔라에 대해 불륨감이 낮고 맛이 텁텁하며 노화 진행이 빠르다고 평가했다. CJ제일제당은 가루쌀을 첨가한 만두피는 잘 찢어져 함량을 늘리려면 글루텐 등 신장성 보완제가 필요한데 원가 상승으로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농식품부는 이에 대해 지난해는 극히 미량으로 테스트한 것이어서 결과가 정확하지 않고 올해는 충분한 물량으로 시제품을 개발 중이어서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식품업계에선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식품업체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국산 쌀 소비책 장려는 대승적 차원에서 식품업체가 함께 해야 할 과제로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새 원료로 신제품을 개발하려면 오랜 기간 품질의 안정성과 시장성을 테스트해 봐야 하는데 갑자기 새 품종으로 새 제품을 만들라고 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밀 이삭 [연합뉴스 사진자료]

가루쌀의 수입 밀 대체 가능성을 제대로 판단하려면 국산 밀이 처한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제분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간 밀가루 총 소비량은 2021년 기준 208만t이다.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은 35.7㎏로 쌀 소비량(1인당 56.9㎏)의 63%에 해당한다. 하지만 국산 밀 식량자급률은 2021년 기준 1.1%로 1984년부터 1% 밑으로 떨어진 뒤 40년 가까이 1% 전후에 머물러 있다. 국내 소비량의 99%를 수입 밀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1990년대 초부터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본격화됐고 정부마다 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으며 2019년 '밀산업 육성법'까지 제정했다. 그러나 국산 밀은 여전히 건강식품을 선호하는 1%의 소비자들만 찾을 뿐, 가격과 품질에서 앞서는 수입 밀에 밀려 맥을 추지 못하는 실정이다. 수입 밀은 과거 국산 밀과 3~4배 가격차가 났으나 최근 국제 밀 가격 상승으로 2배 수준으로 좁혀졌다.

업계에선 국산 밀로도 수입 밀과는 경쟁이 안 되는 현실에서 가격이 더 비싸고 특성 차이도 큰 가루쌀로 수입 밀을 대체하겠다는 정부 대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 연도별 밀가루 및 쌀 소비량

[자료=통계청·한국제분협회 통계자료 취합]

설령 정부 계획대로 수입 밀까지 대체하진 못한다 해도 가루쌀이 국산 쌀 소비를 늘린다면 쌀 수급 안정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쌀 가공산업을 활성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전폭적인 정책 지원 속에 2011년 '쌀가공산업 육성 및 쌀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1차(2014~2018년), 2차(2019~2023년) '쌀가공산업 육성 5개년 기본계획'이 수립돼 추진돼 왔다.

통계청의 양곡소비량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연간 '가공용 쌀 소비량'(사업체부문 쌀 소비량)은 2011년 64만6천t에서 2022년 69만1천t으로 11년간 7%(4만5천t) 늘어났다. 세부 사용처별로 분석해 보면 즉석밥·도시락류가 같은 기간 7만9천t에서 19만2천t으로 143%(11만3천t) 증가한 반면, 주정(酒精)은 24만4천t에서 12만2천t으로 50%(12만2천t) 감소했다. 쌀가루를 쓰는 과자류와 면류는 합쳐서 1만7천t에서 3만1천t으로 77% 늘었지만 11년 동안 증가량은 1만3천t에 그쳤다.

통계청 조사 자료에 제빵용 쌀 소비량은 표시되지 않아 담당자에게 문의했으나 "모집단과 표본(사업체)이 작고 수치가 미미해 별도로 공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실제로 빵, 과자, 면 등의 제조에 사용되는 쌀가루가 통계로 잡힌 것보다 많다고 해도, 지금까지 밀가루 소비량(연간 208만t)의 1~2% 수준에 머물렀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약 이번 정부 계획대로 가루쌀이 공급돼 전량 제품화된다고 가정하면 국내 연간 쌀가루 소비량은 4년 만에 3만t에서 20만~23만t으로 7배가량 늘어나게 된다.

이는 전례가 없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 현재까지 성과가 미미하다는 건 앞으로의 성장 여력이 크다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식품업체들의 잠재력을 믿고 낙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표] 연도별 가공용 쌀 소비량(사업체부문 쌀 소비량·단위=t)

[자료=통계청 '양곡소비량조사']

'가공용 쌀 20만t 수요 창출' 구상은 가루쌀이 언론에 처음 보도되기 1년 전인 2018년 7월 열린 '쌀 산업발전 및 소비활성화 전략 심포지엄'에서 소개된 바 있다. 현 정부 들어 집권 기간 내 목표 달성으로 실행 계획이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 의지 외에 실현 가능성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수요 예측이나 연구 결과는 아직 없는 상태다.

김정주 농식품부 대변인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가루쌀의 장점을 강조하는 건 쌀 문제 대책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꼭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그동안 쌀의 구조적인 공급 과잉을 해결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는데 이번에 정부가 새로운 문제 해결 수단을 제시한 것이어서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이어 "가루쌀은 세계 최초로 개발된 품종이어서 제품 개발과 가격 등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들은 있지만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며 "식품업계에서도 써보겠다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가루쌀 미래 비전 선포식 참석한 정황근 장관 (서울=연합뉴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7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가루쌀 미래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2023.4.27 [농림축산식품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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