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980] 테니스에서 왜 ‘retire’를 ‘기권(棄權)’이라 말할까
윔블던 등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간혹 이상한 스코어를 만난다. 예를들면 4-6, 5-2(retire)라는 형태의 스코어보드이다. 이 점수는 1세트를 4-6으로 내주고, 2세트 5-2로 앞서가다 갑작스런 상황으로 인해 기권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지난 해 윔블던 대회 남자단식 1회전에서 미국 스티브 존슨(세계 랭킹 93위)이 불가리아 그리고르 디미트로프(세계 랭킹 18위)와의 경기 결과이다. 존슨이 갑작스런 허벅지 부상을 당한 디미트로프가 경기를 포기하는 바람에 행운의 기권승을 거둔 것이다.
영어용어사전에 따르면 ‘retire’의 어원은 프랑스어 ‘retirer’이다. 접두사 ‘re’는 다시라는 의미를, ‘tirer’은 끌어들인다는 의미를 각각 갖는다. 16세기 영어로 차용된 이후 여러 의미로 변화했다. 1530년 군대에서 철수한다는 의미로 사용했으며, 1660년 사업이나 일을 그만두는 의미가 추가됐다. 스포츠용어로 1874년 야구에서 아웃처리되거나 선수생활을 그만둔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본 코너 970회 ‘왜 ‘아웃(out)’이라고 말할까‘ 참조)
‘retire’는 ‘기권(棄權)’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이 말은 일본식 한자어이다. ‘버릴 기(棄)’와 ‘권세 권(權)’의 합성어인 기권은 권리를 버리고 행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에선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양에서는 없던 권리에 대한 개념을 고민한 결과, ‘retire’를 ‘기권’이라고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棄權’이라는 단어는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언론에선 일제강점기 때부터 기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921년 7월31일자 ‘결승전(决勝戰)에 배재기권(培材棄權)’ 기사는 ‘대판죠일신문사(대조(大朝))주최인중등학교야구대회의 죠션예션대회(조선예선대회(朝鮮豫選大會))에 배재고등보통학교가 죠션사람측으로 용긔잇게 혼자참가하야 뎨일회전에 불전승을하고 지나간 이십구일 오전에 부산상업학교(부상(釜商))와 뎨이회전에 상대로 싸호아 어럽지안케『알파』로익인것은 이미보도 함과갓거니와당일오후부터 룡산중학교(용중(龍中))를참패케한경셩중학교(경중(京中))와결승전을시작하얏는데배재는뎨일회에셕뎜(삼점(三点))을먼적어든후에계속하야경중군을 맹렬히 육박(육박(肉迫))함에는경중군이 감히 긔운을펴지못하고매회마다배재군의형셰가쵸핫스나 심판원(심판원(審判員))이 경중을위하는불졍(부정(不正))한심판만한다하야배재군은뎨구회초(제구회초(第九回初))에 쾌활히 기권(기권(棄權))을 한 후에 곳 션슈일동과 응원단이 의긔당々히돌아갓더라’로 전했다.
테니스에서 기권 선언은 여러 경우가 있다. 부상, 또는 기구나 기계 고장 등을 이유로 선수가 자의로 도중에 경기를 그만 둘 때, 심판은 기권으로 처리한다. 기권 경기는 6-2, 2-1(ret) 등으로 표시할 수도 있다. ‘ret’는 ‘retire’의 과거형인 ‘retired’의 생략형이다. 이것과 비슷한 뜻을 가진 용어로 ‘default’라는 말이 있다. 남자 그랑프리를 총괄하는 남자 국제프로테니스평의회(MIPTC)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디폴트’는 경기가 개시된 후에 선수윤리규정을 어겨 패배가 선고된 것이다.
세계적인 프로선수들도 경기도중 불의의 부상으로 기권하는 경우가 왕왕 일어난다. 노박 조코비치는 2017년 윔블던 8강전 체코 토마스 베르디흐와의 경기에서 6-7, 0-2에서 팔꿈치 부상으로 경기를 중도에 포기했다. 경기를 시작한 뒤 30여분간 고통 속에서 경기를 하다가 메디컬 타임도 쓰고 처치를 했지만 서브와 포핸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스스로 기권했던 것이다. 현재 남자테니스 세계랭킹 1위 조코비치와 같은 선수들도 오랜 시간 경기를 하다보면 부상이라는 돌변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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