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개미지옥"…수백만원짜리 '할머니 명품' 뭐길래 '불티'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명품시장서도 할매니얼 열풍
우수한 소재에 넉넉한 사이즈
'편안한 옷' 찾는 소비자 사로잡아
”플플(플리츠플리즈) 정말 개미지옥이네요“
지난 1일 오전 11시 이세이미야케 일본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에 5월 신제품이 뜨자 구매자가 한꺼번에 몰려 들었습니다. 구매가 시작된 지 5분 만에 인기 상품은 대부분 품절.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구매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바지 하나에 20만~120만원, 재킷 하나에 38만~250만원에 이를 정도로 비싼 제품이지만 이 브랜드 옷은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 없어서 못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주름으로 이루져 쉽게 늘어나는 헐렁한 티셔츠, 몸빼 바지를 연상시키는 통이 넓은 고무줄 팬츠, 몸 선을 가리는 긴 기장의 치마와 루즈한 원피스….
이세이미야케 플리츠플리즈 옷의 특징입니다. 이 브랜드 옷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할머니 패션’ ‘청담동 사모 패션’의 대명사였습니다. 편하긴 해도 자칫 펑퍼짐해보이고, 일부의 광택이 나이 들어 보이게 한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2030세대가 플리츠플리즈 옷을 찾습니다.
국내에 이세이미야케 플리츠플리즈를 수입하는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지난 4월23일 기준) 이 브랜드의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30% 가까이 신장했습니다. 특히 2021년부터 SSF샵 등 온라인몰으로 유통을 확대하면서 젊은 고객이 크게 증가했다는 설명입니다. 올해 들어서만 SSF샵에서 플리츠플리즈를 구매한 신규 고객은 무려 2000여명이 늘었습니다. 남성용 브랜드인 '옴므플리세 이세이미야케'도 찾는 손길도 늘었습니다.
이 브랜드의 신상품은 매달 1∼2차례 출시되는데 입고와 동시에 '완판'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신제품이 나오면 기존에 출시됐던 상품은 단종되는데 일부 인기 디자인은 온라인 중고거래 시장에서 웃돈까지 붙어 팔릴 정도입니다. 작년 10월에 나와 큰 인기를 끌었던 긴 기장의 랩스커트는 정가가 70만원에 달할 정도로 가격대가 높지만 구매 대란이 일면서 프리미엄(웃돈)을 줘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품귀 현상을 보였습니다. 판매된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최근에도 베이지나 블랙 등 인기 색상은 10만~20만원을 더 줘야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수요가 많습니다.
백화점 매장에서도 신제품이나 인기제품이 출시되면 마치 샤넬·롤렉스처럼 ‘오픈런’(매장 개점 시간 기다리다 열릴 때 달려가 구매하는 일) 사태가 벌어집니다. 플리츠플리즈는 지난해 간암으로 타계한 일본 출신인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1993년 선보인 브랜드입니다. 이세이 미야케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하면 떠오르는 검은 터틀넥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미야케가 개발한 ‘플리츠플리즈’는 ‘Pleats’(플리츠·주름)라는 이름처럼 옷 전체에 얇은 주름이 있습니다. 대형 원단을 먼저 재단하고 형태를 잡아 재봉한 뒤 특별 가공을 합니다. 마치 아코디언처럼 잘 늘어났다가도 제 모습을 찾는 게 특징입니다.
국내에서는 옷 잘 입기로 유명한 가수 강민경이 주름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어 ‘완판 행렬’을 보인 바 있습니다. 농구 스타 허훈이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골지’(골이 있어 신축성이 좋고 물 빠짐이 빠른 원단)라 부르며 주름 패션 찬사론을 읊자 ‘허훈 패션’ ‘골지 패션’ 등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적도 있습니다. 허훈의 의상은 플리츠 플리즈의 남성 라인인 옴므 플리세였습니다. 깡마른 체형의 연예계 대표 ‘소식좌’(적게 먹는 사람) 코드 쿤스트부터 패셔니스타 배우 봉태규까지 두루두루 애용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방일 당시 김건희 여사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서 이세이 미야케 옷을 선물받아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처럼 명품시장에서도 ‘할매니얼 트렌드(할매+밀레니얼)’가 옮겨 붙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맞아 편한 의상을 찾는 현상이 주효하면서 주목받은 패션 트렌드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선호하는 명품의 특징은 ‘극강의 편안함’. 주로 소재가 우수하고 사이즈가 넉넉해 입은 듯 입지 않은 느낌, 신은 듯 신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이 장점입니다.
140만원대 로로피아나의 ‘썸머 참스 워크’ 로퍼도 20~30대 사이에서 인기있는 할아버지 신발입니다. 스웨이드 카프스킨 재질로 된 이 로퍼는 부드러운 착화감으로 사계절 신는 신발로 부유층 중장년 세대에서 인기가 높았던 제품이지만 최근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소비자가 많이 찾습니다. 국내에서는 2014년 유병언 전 세모 그룹 회장이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점퍼 브랜드로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땅콩 회항’ 논란 당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착용하면서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즐겨 찾기로 유명한 브랜드입니다.
마치 동네 마실을 나온 할머니가 들법한 디자인의 407만~449만원짜리 에르메스 ‘피코탄’ 핸드백도 명품 마니아들 사이에선 편한 제품으로 유명합니다. 말 사료 주머니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는 이 가방은 지퍼나 단추가 없는 장바구니 같은 자연스러운 모양과 쉽게 구겨지는 가죽 재질이 특징입니다. 심플한 디자인에 실용성까지 갖췄다는 게 소비자들의 평가입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워낙 달려 수십번씩 오픈런을 해도 구하기 어려운 가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수 겸 배우 수지가 매고 나와 품절 사태를 빚은 70만원짜리 에르메스 스카프도 대표적인 할매니얼 명품템입니다.
30대 직장인 최모 씨(34)는 최근 이세이미야케 의류 몇 점과 로로피아나 로퍼, 에르메스 스카프 등을 사면서 할머니 명품템을 대거 장만했습니다. 최씨는 “남들 눈에는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몸에 걸친 옷과 소품 가격이 거의 1000만원에 이를 정도로 돈을 많이 썼다”며 “편하지만 왠지 소재나 디자인이 은근 슬쩍 고급스러운 게 할매니얼 명품룩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명품업계 관계자도 “최근 명품시장에서도 활동성과 실용성이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며 “이를 인스타그램 등 SNS로 적극 공유하는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소비자들은 옷 한 벌로, 또는 가방 하나로 딸-엄마-할머니 혹은 아들-아버지가 같이 착용하기도 합니다. 30대 한모 씨(35)는 60대 어머니와 80대 외할머니와 플리츠플리즈 옷을 공유합니다. 한 씨는 “누가 입어도 잘 맞아 실용성을 갖췄다”며 “최근 플리츠플리즈 치마를 입고 마트에 갔는데 7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옷이 예쁘다며 구매처를 묻더라”고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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