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파 항의로 문 닫은 교과서 회사 "이제 종군위안부는 못 다룬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21세기의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1928년생)는 1990년 스페인에 강연을 갔다가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뜻밖에도 그곳 젊은이들이 스페인의 어두운 과거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스페인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동안 내전이 벌어져 35만 명이 죽은 비극을 겪었다. 제2공화국에서 합법적인 선거를 거쳐 들어섰던 인민전선 정부(공화파)를 무너뜨리려는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장군의 반란 때문이었다.
촘스키, "젊은이들은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몰랐다"
이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장군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일제 강점기 기간보다 1년 더 긴) 36년 동안 철권을 휘둘렀다. 30만 명의 정치범을 감옥에 가두는 등 자유와 민주화를 바라는 목소리를 힘으로 눌렀고, 스페인을 유럽의 정치적 후진국으로 떨어뜨렸다. 그 암울했던 시기에 스페인 교과서는 어땠을까. 절대 권력자 프랑코의 통치를 미화하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촘스키는 '서양이 저지른 기나긴 테러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에서 스페인에 강연을 하러 갔다가 놀랐던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스페인에서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몇 번 했다. 1990년, 그러니까 프랑코가 물러난 지 15년이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에서 대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1936-37년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났던 한 유명한 사건을 언급했더니, 젊은이들은 내전이라는 게 뭔지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이들은 오로지 내 나이 또래의 어른들뿐이었다.
그 바로 뒤 오비에도에 가서 강연했다. 그곳에서는 1934년 좌파 폭동이 있었고, 군대가 투입되어 진압했던 역사가 있다. 시민회관이 점령되고 사망자가 생겨났었다. 마침 나는 바로 그 시민회관에서 강연을 했고, 주민들이 으레 그런 역사를 다 알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게 아닌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는 것은 오직 내 나이 또래의 어른들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참 그야말로 깜깜했다고!"(노엄 촘스키&안드레 블첵, <촘스키, 잔인한 그러나 은밀한> 베가북스, 2014, 52쪽)
"프랑코의 교과서는 내전 진상을 왜곡"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스페인 교과서에서 그런 내용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고, 언론들도 침묵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코 총통 독재체제 아래서 나온 교과서에선 전쟁범죄나 인권탄압에 관련된 얘기는 없다. 독재자의 입맛에 맞게 스페인 내전의 실상을 왜곡했다. 촘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흑과 백의 삭막한 용어'로 설명했을 뿐이다.
인민전선 정부를 이끌었던 공화파(좌파)에 대해선 학생들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판단을 심어주고, 쿠데타 세력에 대해선 '거의 신화적인 용어'로 치켜세웠다. 미국의 교육전문가인 엘리자베스 콜이 펴낸 책에서 그 시기의 스페인 역사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대목 하나를 옮겨본다.
[(프랑코 총통) 독재 시기의 역사 교과서들은 제2공화국과 내전에 관하여 상세한 역사적 지식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교과서들은 공화국 시기에 관한 설명을 도덕적으로 부정한 판단에 국한시켰다. 이 시기에 활동한 주요 인물들의 이름과 그들이 추구한 개혁을 위한 노력은 완전히 생략되었다. 따라서 교과서들은 그 시기의 발전 과정에 관하여 학생들의 이해 증진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역사적 맥락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콜, <과거사 청산과 역사교육> 동북아역사재단, 2010, 290쪽).
프랑코 독재 시절의 교과서에서 스페인내전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는 '의로운 봉기'였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몇 년이 지나서야 '스페인전쟁'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가 쓰이게 됐다. 그럼에도 교과서에서 프랑코 독재체제 아래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혹심했던 박해와 억압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좌파정당인 사회노동당(PSOE)이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4년 동안 집권했어도 군부의 강한 영향력 등으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스페인내전의 진실이 제대로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들어와서였다. 2002년 스페인의회는 만장일치로 프랑코 장군을 '자유를 탄압했던 독재자'로 못 박았다. 아울러 의회는 프랑코가 생매장해던 희생자들의 유골을 정부가 나서서 발굴하라고 의결했다. 보수 국민당(PP)의 짧은 집권을 거쳐 2004년 PSOE가 다시 선거에서 승리하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동안 감춰졌던 프랑코장군의 전쟁범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5년엔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에 세워져 있던 대형 프랑코 기마상을 없애는 등 스페인 전국에서 독재기념물들이 공공장소에서 사라졌다. 정치권의 변화가 교과서 내용과 사회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스페인에서도 확인된다.
'위안부' 성노예 사실 모르는 일본 젊은이들
과거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젊은이들은 스페인뿐 아니다. 필자가 9.11테러 무렵인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면서 만났던 일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공이 국제정치학 또는 국제관계학인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조차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위안부' 성노예, 강제동원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처음엔 '거북한 얘기를 피하고 싶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중에 거듭 확인해보니, 실제로 잘 알지 못했다.
1990년 촘스키의 강연을 듣던 스페인 젊은이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내전의 상황을 왜 잘 모를까. 더 나아가, 유럽의 젊은이들은 왜 지난날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벌였던 착취와 잔혹행위에 대해 잘 모를까. 특히 일본 젊은이들은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한 일본의 지난날 전쟁범죄에 대해 왜 잘 모를까. 스페인이나 일본이나 결국은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이어진다.
남의 나라 얘기할 것도 없다. 1980년대 한국을 철권 통치했던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학교를 다닌 이 땅의 학생들도 진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의 학생들은 (스페인 프랑코 독재시절의 스페인 학생들이 '프랑코 찬가'를 배웠듯이) '전두환 찬가'를 배웠다. 그때 나온 국사 국정교과서를 보자.
[(10.26으로 박정희가 죽은 뒤) 한때 혼란 상태가 나타났고, 이런 혼란 속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 위기에서 벗어나고 국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정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구성한 뒤 각 부분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1982, 175-176쪽).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는 동시에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 복지 국가건설을 지행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게 빛날 것이다](같은 책, 178쪽).
1980년대의 국사 교과서는 1979년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12.12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고, 그 뒤 체육관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은 제5공화국 전망을 장밋빛으로 치장했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학생들은 1980년 5.18 민중항쟁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남한을 혼란에 빠뜨리려 무장 폭동을 일으킨 탓에 일어난 유혈사태'쯤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했다. "그게 아니고요. 진실은..."이라 말하는 교사·교수나 언론인은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기관원의 험상스런 얼굴과 맞닥뜨려야 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시절이나 일제 강점기에 그랬던 것처럼.
언어학자 촘스키는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가운데 하나로 '세뇌'(indoctrination)를 꼽았다. "교육을 '세뇌'로 바꿔 읽는 게 더 이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교육제도 자체가 '세뇌 시스템'이 될 수 있다. 촘스키에 따르면, 지배권력의 입맛에 맞는 교육제도 아래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진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왜곡된 진실'을 주입식으로 공부하기가 십상이다.
촘스키의 이 말을 역사교육에 적용한다면, 독재권력(아시아태평양 전쟁 시절의 일본,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전두환 치하의 한국) 아래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은 통치자들이 저지른 어두운 과거사를 제대로 배우기는커녕 그들의 범죄를 은폐시키고 나아가 미화하는 내용을 배우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아이리스 장, "전쟁범죄 왜곡하는 교과서 검정 멈춰야"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황소걸음, 2005)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 뒤에 감춰진 의도를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사교사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줘야 한다. 막상 현실에선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일본인들이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잘 모르는 것은 일본 교육계에도 책임이 크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행해지는 교과서 검정제도다. 이 제도는 1945년 일본 패전 뒤 맥아더 장군의 미 군정이 일본의 교과서에서 지난날 군국주의적 성향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고 실시한 뒤로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검정 제도 아래서 일본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들과 집필진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 문부과학성(문교부)이 학생에게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학습 내용을 담은 '학습지도요령'과 검정 통과다. 일선 학교에서 교과서가 채택되려면, 먼저 검정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검정을 통과하려면 문부과학성이 제시한 학습지도요령을 잘 따라야 한다. 그런 다음 출판사는 원고 단계의 교과서를 문부과학성에 제출하고, 교육전문가들로 이뤄진 '교과서 검정위원회'에서 심사 합격을 받아야 한다. 학습지도요령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다면? 검정을 통과할 수 없고 따라서 교과서로서 학교 현장에 채택될 수 없다. 일선 학교 교사들이 교과서로 채택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렇듯 일본 정부는 검정 제도를 이용해 교과서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보수 극우 세력의 입맛에 맞게 교과서 검정의 기준이 되는 학습지도요령과 해설서를 바꿔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교과서 집필자가 지난날 동아시아를 혼란 속에 빠뜨렸던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의 문제점을 빠뜨리질 않고 비판한다면? '낙타 바늘귀' 비유마냥 검정 통과는 애당초 무리다.
이 '전쟁범죄 이야기' 연재 3회째 글에서 1937년 난징 학살을 살펴봤었다.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으로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했던 아이리스 장도 일본 교과서 검정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책을 낸 1년 뒤인 1998년12월, 아이리스 장은 사이토 쿠니히코 주미 일본대사와의 TV토론에서, "일본 정부가 난징 학살에 관련한 서술을 왜곡 또는 축소하도록 만드는 교과서 검정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었다.
중국에서의 난징 학살뿐 아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선 우리 한국의 '위안부' 성노예에 대한 언급도 아예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축소 왜곡된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니 일본 젊은이들이 침략전쟁에 얽힌 어두운 과거사와 전쟁범죄상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극우파 항의로 문 닫은 교과서 회사, "지금도 분합니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과거사를 왜곡하고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려는 자민당 우파 정부의 시각과 다른 내용은 검정 과정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요행히 통과하더라도 일본 극우파들의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시비를 거는 집단행동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이래저래 일본 교과서 업체와 집필진들은 압박감을 받기 마련이다. 스스로 '자기 검열'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일선학교에서 채택되기가 어렵다. 채택이 안 되면? 교과서 업체는 적자를 보느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아야 한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니혼쇼세키(日本書籍)는 일본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제법 규모가 큰 교과서 회사였다. 1945년 이전에는 국정교과서를 만들었고, 패전 뒤 오랫동안 검정 교과서를 만들어 왔다. 특히 중학교 역사교과서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90년대까지 도쿄 23개 구의 중학교 모두가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를 썼다. 그런데 1997년 이 회사에 위기가 닥쳐왔다. 회사의 교과서에서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었다.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을 통과했는데도, 일본 극우파들이 벌떼처럼 니혼쇼세키를 비난하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협박 전화와 항의 편지에 대응하느라 일상적인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극우파들은 각 구의 교육위원회나 학교에도 몰려가 "니혼쇼세키의 역사교과서를 채택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그런 압박이 통해서였을까, 2001년 도쿄의 23개 구에서 2개 구만 니혼쇼세키 교과서를 채택했다. 2002년도 마찬가지였다. 적자를 이겨내지 못한 니혼쇼세키는 2003년 끝내 문을 닫았다. 그곳에서 일했던 한 직원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분합니다. 교과서인 이상 (지난날 일본이 동아시아 이웃국가들에 저질렀던) 가해의 역사를 당연히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기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파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공기가 다른 회사의 교과서 제작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입니다. 업계 전체에서 '니혼쇼세키처럼 되지 말자'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교과서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야스다 고이치, <일본 '우익'의 현대사> 오월의 봄, 2019, 281-282쪽).
이에나가 사부로의 32년 교과서 투쟁
일본에도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자성(自省)사관을 지닌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일본의 지난날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해왔다. 이에나가 사부로(전 도쿄교육대교수, 1913-2003)도 그런 생각을 지닌 역사학자였다. 그는 일본이 도쿄올림픽 개최를 1년 앞두고 흥청대던 1963년, 고등학교용 일본사 교과서를 쓰고 문부과학성에 검정을 신청했다. 그의 교과서엔 난징학살(1937년)과 731부대의 세균전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문부과학성이 검정 과정에서 시비를 걸었다. 일본의 지난 침략전쟁을 '무모한 전쟁'이라 비판한 대목, 난징학살과 731부대 등 '전쟁의 비참한 측면'을 다룬 대목들을 뜯어고치거나 아예 빼라고 요구했다. 집필자인 이에나가 교수가 이를 거절하자, 문부과학성은 그의 교과서를 검정에서 불합격시켰다. 그러자 이에나가는 1965년 국가를 피고로 재판을 걸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표현의 자유를 어겼고, 교육 내용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금지하는 교육기본법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나가가 재판을 청구하면서 발표한 호소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전쟁 중에 한 사람의 사회인이었던 나는 지금 생각하니 전쟁을 찬미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을 참회한다. 지금 전쟁의 싹이 있다면 반드시 없애야만 한다. 전쟁으로 우리 세대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많은 동료들이 죽어갔다. 이 큰 희생을 바탕으로 (이른바 '평화헌법'이라 알려진) 헌법이 만들어졌다. 평화주의, 민주주의라는 두 기둥은 그들의 숭고한 생명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다. 이것을 헛되이 해선 안 된다"(한중일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미래를 여는 역사> 한겨레신문사, 2005, 236쪽).
이에나가의 법정 투쟁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1965년에 이어 1967년, 1984년에도 재판을 청구했다. 무려 32년을 끈 교과서 소송에서 이에나가 혼자 싸운 것은 아니었다. 2만7000명의 교사 시민들과 여러 단체들이 함께 그의 소송을 도왔다. 1997년 일본 대법원은 이에나가의 손을 들어줬다. "난징학살과 731부대 등 일본의 전쟁범죄를 빼라고 한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은 위법하다"는 판결과 함께였다.
2001년 이에나가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빛났다.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일본 정부나 극우파의 입김 아래 왜곡되는 흐름을 늦추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노벨평화상이란 게 정치적 고려가 담뿍 들어간 밀실 담합으로 의혹을 받는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전쟁범죄자들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침략을 '진출'로, 3·1운동을 '폭동'으로 왜곡 지침
이렇듯 일본 교과서 검정 문제와 과거사 왜곡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41년 전인 1982년 여름 요미우리(読売)신문의 특종 보도로 큰 파문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과정에서 △20세기 전반기 한반도와 만주, 중국대륙으로의 잇단 침략을 '진출'로, △1919년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3·1운동을 '폭동'으로 고치고 △일제 말기의 '강제징용'이란 용어도 삭제하라는 지침이 파문의 핵심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검정담당관들은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에 관한 기술에 있어서도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문제점을 대충 뭉개버린 역사교과서가 문부성 검정을 받게 되고, 그에 따라 교과서 내용이 바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커다란 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한국과 중국에서는 "일본의 교육당국이 과거사를 미화하고 왜곡하려 하고 있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그동안 줄곧 일본정부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요구해왔던 동아시아 국가들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다.
기억에도 새롭지만, 일본을 성토하는 집회들이 잇달아 열렸고, 식당이나 택시에서 일본인 손님을 거절하고 일본 상품의 불매 운동도 벌어졌다(2019년 여름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무역 제재를 하자, 그에 맞서 일어났던 일제 불매운동과 닮았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본 정부는 "교과서 검정작업은 공정하게 이루어졌고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자민당 지도부도 회의 끝에 "일본 정부는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결의하였다. 한 일본 각료는 "일본의 교과서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은 내정간섭에 해당한다"고까지 반발했다.
일본 정부 안에서 이 문제로 갈등이 생겨났다. 외무성은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려면 검정 지침을 고치는 쪽으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문부과학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과거사 문제로 싸워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한 스즈키 젠코 총리가 사과를 하면서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서 만들어진 것이 교과서 검정 기준 중 하나인 '근린제국 조항'이다. 풀어 쓴다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각국들과도 관계가 있는 일본 근·현대사를 쓸 때엔 이웃나라들의 입장을 배려한다는 것이다.
곧 드러난 사실이지만, 일본이 '근린제국 조항'으로 꼬리를 내린 것은 아시아의 분노와 반일감정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 방편일 뿐이었다. 지난날 군국주의 시절의 강대국 일본을 그리워하는 극우파들의 본성은 바꾸지 않는 법이다. 이들은 '근린제국 조항'을 없애자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 이 조항이 지금도 유효할까. 사실상 아니다. 교과서 집필자, 일본 정부, 일본 언론들도 그런 조항을 잊진 않았을 테지만, 모른 체하는 모습이다.
역사전쟁은 현재진행형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저질러졌던 억압 통치와 그에 따른 피지배자들의 고통,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벌어졌던 전쟁범죄에 관한 내용이 축소 왜곡 삭제되는 방향으로 틀어가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커졌다. 이런 흐름 아래 나온 것이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파동을 비롯한 일본의 잇단 교과서 왜곡이다. 한국에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동에 이어 국정교과서를 둘러싼 몸살을 앓았었다(21세기에 한일 양국에서 벌어졌던 교과서 파동은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임).
교학사와 후소샤 교과서 둘 다 일선 교육현장에서 외면당하는 바람에 폐기 수준에 이르렀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일본 정치권과 손잡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이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다. '자유주의 사관'이란 듣기에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는 이들에게는 <반일 종족주의>로 대표되는 한국의 '신친일파'가 엄청 고맙고도 소중한 자산이다.
오는 7일 한국에 오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역사전쟁의 한 축을 맡은 전사(戰士)다. 그가 외무장관으로 있을 때 내뱉은 말을 검색해보니, 독도는 일본 땅이라 우기고 소녀상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다. 정치이념이란 잣대로 보면, 온건 보수로 알려져 있지만, 대외정책에서는 지난해 7월 유세장에서 총에 맞아 죽은 극우 정치가 아베 신조와 이렇다 할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역사전쟁은 나라 안팎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다음 주에 독자들과 함께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후반부를 매듭지으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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