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없었던 코리안 메이저리거…초스피드로 무장한 배지환
출루율만 높인다면 ‘도루왕’도 가능하다는 평가…6일 당한 발목부상 정도가 관건
(시사저널=김형준 SPOTV MLB 해설위원)
4월, 메이저리그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를 합쳐 총 30개 팀 가운데 연봉 총액 27~29위의 최하위권 팀들인 탬파베이, 볼티모어, 피츠버그가 나란히 승률 1~3위에 오른 것이다. 프로의 성적은 곧 투자와 정비례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돈을 적게 쓰면서도 5년째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는 탬파베이와 유망주를 모아 팀 재건에 성공한 볼티모어의 선전은 어느 정도 예상된 바 있다. 하지만 피츠버그의 반란은 아무도 몰랐다.
10년 전 피츠버그는 땅볼 혁명을 일으켰다. 땅볼 유도에 유리한 싱커를 투수들에게 주입하고, 시프트 수비로 땅볼 아웃을 쓸어담았다. 피츠버그를 시작으로 싱커 열풍이 불자 타자들은 퍼올리는 스윙으로 대응했다. 투수들은 어퍼 스윙으로는 칠 수 없는 높은 빠른공을 던지기 시작했지만 피츠버그는 유행이 지난 싱커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10년 만에 피츠버그는 새로운 히트상품을 들고나왔다. 안타를 맞을 확률이 낮은 변화구를 극단적으로 많이 던지도록 한 것이다. 일단 4월은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투수의 피로도를 높이는 변화구 위주의 피칭이 유지될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돌풍의 팀 피츠버그는 또 하나의 틈새시장을 노렸다. 바로 아시아 혈통을 가진 선수들의 영입이다.
100m를 10초6에 주파…메이저리그 '스피드 야구'와 부합
올해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에 등록된 아시아 출신 선수는 일본 8명, 대한민국 4명(류현진·최지만·김하성·배지환), 대만 1명으로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롭 레프스나이더, 키스턴 히우라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도 있지만, 미국 대학리그에서도 아시아계 선수 비율은 1.1%에 불과하다. 하지만 피츠버그는 최지만·배지환·심준석 등 3명의 한국인 선수와 대만 출신 정쫑저, 중국계 코너 조 등 아시아계 선수를 대거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KBO리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선수로 거론됐지만 메이저리그 직행을 택한 덕수고 출신 심준석(19)은 특히 게릿 콜 이후 끊긴 대형 정통파 우완의 명맥을 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피츠버그가 아시아 선수를 좋아하기 시작한 시점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츠버그는 KBO리그 출신 유격수를 영입하는 깜짝 선택을 했다. 넥센 히어로즈 강정호였다. 2016 시즌 후 한국에서 일어난 음주운전 파문으로 인해, 강정호의 활약은 2년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2년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던 강정호였기에,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이 주목을 덜 받는 아시아 선수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북고 출신으로 100m를 10초6에 뛸 수 있는 배지환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기다리는 대신 메이저리그 애틀랜타와 2017년 9월에 계약했다. 발표된 계약금은 30만 달러. 배지환 수준의 유망주에게는 너무 적은 액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흑막이 있었다. 애틀랜타 존 코포렐라 단장이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국제 유망주들의 계약금을 줄여 발표했던 것이다. 코포렐라는 야구계에서 퇴출됐고, 계약이 취소된 선수들은 졸지에 미아가 됐다. 배지환도 이때 심리적으로 큰 방황을 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겨울을 보내고 나서야 배지환은 피츠버그와 계약할 수 있었다. 계약금은 125만 달러였다.
애틀랜타에 비하면 피츠버그는 미래가 어두운 팀이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애틀랜타로 가지 않은 건 배지환에게 전화위복이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추구하는 변화를 감지한 피츠버그는 '스피드 야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배지환의 활용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4월을 끝낸 시점에서 배지환의 현재 타율은 0.250 안팎으로 그리 높지 않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OPS 0.652는 메이저리그 평균인 0.724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배지환은 OPS에 반영되지 않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스피드다.
배지환은 전력으로 뛰었을 때 갈 수 있는 초당 거리인 스프린트 스피드가 29.3피트(8.93m)로 메이저리그 상위 3%에 해당한다. 역대 한국인 메이저리그 선수 중 가장 빠른 선수이자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 이후 가장 빠른 아시아 선수다. 배지환은 주루 센스까지 뛰어나다.
4월5일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팀을 구해내는 중견수 수비를 하고 통산 첫 홈런을 그린몬스터 위로 쏘아올렸던 배지환은 12일에는 지난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 카운트를 잡아냈던 라이언 프레슬리(휴스턴)를 상대로 2호 홈런이자 데뷔 첫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다. 하지만 진가를 더 발휘한 경기는 26일 다저스전이었다.
평범한 내야안타를 사실상의 '2루타'로 만드는 폭풍 질주
이날 2회 내야안타를 치고 나간 배지환은 다저스 선발 노아 신더가드를 상대로 2루를 훔쳐냈다. 신더가드는 3루까지 넘보는 배지환을 신경 쓰다 몸에 맞는 볼을 허용했고, 그다음 타자에게는 2루타를 맞아 두 점을 실점했다.
4회에 다시 배지환은 1사 후 내야안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2루 도루에 성공했다. 평정심을 잃은 신더가드는 이후 4점을 더 허용했다. 도루를 통해 두 개의 내야안타를 두 개의 2루타로 바꾼 배지환이 두 번 모두 홈을 밟는 사이 신더가드는 6점을 내주고 무너졌다. 다음 날에도 배지환은 안타 3개를 때려내고 도루 3개를 성공시켜 다저스의 안방을 유린했다. 그리고 피츠버그는 대승을 거뒀다.
올해부터 메이저리그는 투수의 '무한 견제'가 금지됐다. 세 번째 견제구를 던졌는데 잡아내지 못하면 보크가 선언된다. 도루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따라서 상대 투수에게 도루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해졌다. 배지환이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보직이다.
역대 최고의 1번 타자인 리키 헨더슨은 1989년 랜디 존슨과의 대결에서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으로 존슨을 철저하게 괴롭혔다. 한 해 130개 도루를 하기도 한 헨더슨은 2위보다 400개 이상 많은 통산 1406도루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2013년 빌리 해밀턴이 등장해 어깨가 가장 좋은 포수인 야디에르 몰리나와의 대결에서 연전 연승을 거뒀을 때, 해밀턴의 도루 실력이 헨더슨을 능가한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해밀턴은 10년 동안 324개 도루에 그쳤고, 올해는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다.
헨더슨과 해밀턴의 가장 큰 차이는 출루였다. 최고의 선구안과 정확한 타격의 헨더슨이 도루 기회가 많았던 반면, 정확성과 선구안이 떨어지는 해밀턴은 출루가 힘들었기 때문에 도루 기회가 적었다. 야구에는 '1루는 훔칠 수 없다'는 격언이 있다.
4월이 끝난 시점에서 배지환보다 도루를 많이 한 유일한 선수인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애틀랜타)는 52번 출루했고 13번 도루에 성공했다. 배지환은 26번 출루해 11번 도루에 성공했다. 아쿠냐만큼 출루할 수 있다면 배지환은 매년 도루왕이 될 수도 있다. 배지환의 관건이 출루인 이유다.
과거 빠른 선수들에게 주어졌던 1번 또는 2번의 자리는 이제는 장타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는 복고를 꿈꾸고 있다. 옛날 야구가 더 재미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배지환은 번개 발을 자랑하는 1번 타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 배지환의 눈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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