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 ‘전설매치’ 무승부의 축구적 해석

골닷컴 2023. 5. 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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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3년 전 주식 투자 열풍 필자의 귀도 팔랑거렸다. 1년 뒤에 ‘현타’가 가정방문했고, 주식계좌 잔고는 왔던 곳(일반통장)으로 돌아갔다. 그랬더니 친구가 “야, 너 그게 돈 버는 거야”라고 칭찬했다. ‘금융 마지노선’의 소극적 방어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 소득 감소 같은 퍽퍽한 소리는 사양한다.)

스포츠는 이런 삶의 해석이 잘 통하지 않는다. 특히 프로스포츠는 승패가 즉각적이고 명확하다. 이기든가 지든가, 흑과 백, 모 아니면 도의 세계다. 뭐든지 애매한 인생과 달리 스포츠는 ‘위너’를 정한다. 그래서 통쾌하다. 응원 대상(팀, 개인)이 이기면 마치 내가 이긴 것처럼 느낀다. ‘승리 후광 누리기(BIRGing; basking in reflected glory)’라는 개념이다. 스포츠팬은 승리를 보고 싶어 시간과 돈을 들여 경기장을 찾는다. 스포츠에서 승패 결과는 당연히 제공되어야 할 요소다.

축구는 약간 다르다. 무승부가 존재한다. 심지어 빈번하다. 2022년 카타르월드컵 결승전도 공식적으로는 무승부였는데 토너먼트인 탓에 억지로(?) 승자를 정했다. 리그전에서는 그 방법도 동원하지 않는다. 관중을 수만 명씩 불러다 놓고 승패를 가리지 않은 채 경기를 끝내버리곤 한다. 지난 시즌, 대구FC는 리그 38경기 중 무승부가 16차례(42%)였다.

역설적으로 무승부야말로 축구가 팬들을 끌어당기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축구는 승패를 가르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 인생처럼 말이다. 비슷한 존재끼리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말씀. 둘은 닮았다. 우리 일상도 승패의 경계가 모호하다.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대부분 사람은 적당한 ‘무승부 상태’로 지낸다. 여자친구 한 번 만들기 어려운 것처럼 축구에서 한 골 넣기가 무척 어렵다.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가 리드 상황을 지키는 만큼 힘들고, 결국 ‘제로’로 끝나는 일이 허다하다. 인생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공감하기 쉽고 더 정이 간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FC서울과 전북현대모터스가 맞붙었다. 기록적 폭우 예보에도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3만7천 명이나 되는 손님이 들었다. 경기 시작 11초 만에 구스타보가 선제골을 터트렸다. 봄비에 젖은 서울의 선수단과 서포터즈 머리 위로 다시 한번 녹색 찬물을 확 끼얹은 꼴이었다. 다행히 서울은 경기 막판 ‘이 구역의 미친개’ 박동진이 동점골을 뽑아냈다. 경기 내내 ‘그린’으로 흐르던 승부가 결국 ‘검빨’이 섞여 무색으로 마무리되었다.

무승부는 두 팀 모두에 구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서울은 시즌 초반 기세를 살려 2천 일 이상 묵은 ‘전설매치’ 무승 징크스를 깨지 못해 아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5월 5일 어린이날 무패 기록은 수성되었다. 막판 득점을 통해 ‘루저’ 일보 직전에 살아나는 희열도 선물했다. 어린이들 앞에서 최소한 고개 숙인 패배자가 되지 않았다. 빅매치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지 않았다는 의미는 전북에 더 컸다. 알다시피 현재 전북의 상태는 최악이다. 카타르월드컵 출전자 중에서 백승호만 경기에 나섰다. 지난 경기 퇴장으로 홍정호는 자리를 비웠다. 외국인 선수들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빅매치 하루 전 김상식 감독이 물러났다. 경기 중에 서포터즈는 연신 “허병길 나가”를 외쳤다. 이런 상태로 리그 2위의 안방에서 벌어진 경기가 쉬울 리가 없다. 격투 속에서 전북은 승점 1점을 챙겼다. 전북의 무승부는 2라운드(3월 5일) 이후 두 달 만이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경기 운영에서 숨을 고르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서울과 전북은 승자가 되진 못했어도 최악은 면했다. 우리는 돈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돈을 벌었다’라고 말하지만, 두 팀은 실제로 승점까지 1점씩 벌었다. 이날 하루 K리그가 잃은 것은 폭우 예보에 날아간 관중수 정도였다. 세상만사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축구와 인생의 가르침이다. 경기 후, 박동진은 “전북 어린이들의 동심을 파괴한 건 미안하지만, 어차피 커선 다 알게 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미친개’의 농담은 누구나 승자가 될 순 없고, 세상에는 패하지도 않는 방법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삶의 지혜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 같다.

글, 그림 = 홍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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