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축구에 미친 나폴리, 33년만의 우승에 온세상이 하늘빛

나폴리는 거대한 축제 중…가는 곳마다 하늘색 플래카드와 깃발
"나폴리인은 축구 위해 사는 사람들…김민재는 글래디에이터, 한국의 만리장성"
남북부 격차 문제 속 차별의 한까지 풀어 "우리 얕잡아보는 북부 사람들에게 본때"

(나폴리=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5일(현지시간) 찾아간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 나폴리는 말 그대로 온 세상이 하늘빛이었다.

곳곳에 하늘색 플래카드와 깃발이 나부꼈고, 도로와 골목은 마주 보는 집들을 연결한 하늘색·흰색 천이 층층이 쌓여 거대한 육교가 세워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하늘색·흰색 천은 마치 물결치는 파도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 나폴리의 우승 소식은 그렇게 연고지인 나폴리를 팀을 상징하는 하늘색 물감 속에 풍덩 빠뜨렸다.

나폴리가 세리에A를 제패한 건 1989-1990시즌 이후 무려 33년 만이자, 1986-1987시즌을 포함해 통산 세 번째다.

나폴리는 축구에 미친 도시로 통한다. 나폴리에서 만난 주세페 라바노(47)씨는 "우리는 축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축구가 종교나 다름없는 이들은 나폴리가 33년의 긴 기다림 끝에 현지시간으로 지난 4일 우승을 조기에 확정하자 감격에 겨워 나폴리 거리를 가득 메웠다.

나폴리 당국이 폭죽 사용을 금지했지만 소용 없었다. 광란의 파티로 200명 이상이 다쳤고, 심지어 사망자 1명도 나왔다.

하루 뒤인 이날에도 나폴리 시내 중심인 플레비시토 광장에는 나폴리 유니폼을 입은 시민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대규모 단체 응원은 드물었지만, 이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가족, 친구와 광장을 거닐며 우승의 여운을 만끽했다.

차창 밖으로 나폴리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 반려견에게 나폴리 유니폼을 입힌 사람들까지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승을 축하했다.

가족과 함께 광장에 나온 안드레아 까까체(40)씨는 "나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폴리를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갓난 아들과 딸에게도 나폴리 유니폼을 입힌 그는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자녀들이 나폴리를 응원할 것"이라고 했다.

친구 사이인 젊은 20대의 남녀 4명도 부모 세대만큼 이번 우승이 특별하다고 입을 모았다.

펠리체씨는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33년 전 우승에 대해 너무나 많은 얘기를 들었기에 우리도 그만큼 크게 감동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씨는 "나폴리는 세계에서 위대한 축구 선수 마라도나가 뛰었기 때문에 특별한 구단"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가 낳은 불세출의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 입단 직전 승점 1점 차로 강등을 겨우 피했던 나폴리는 마라도나 입단 3년 차에 우승을 차지했다.

나폴리 축구 역사를 바꿔놓은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선 신(神)적인 존재다.

루치아노 스팔레티 나폴리 감독은 우승 확정 뒤 "마라도나의 가호가 있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라도나가 떠난 뒤 나폴리는 세 번의 강등과 네 번의 준우승을 겪었다. 팬들의 오랜 갈증을 끝내준 우승 주역 중에는 한국인 수비수 김민재가 있다.

김민재는 올 시즌을 앞두고 '나폴리의 왕'이라고까지 불렸던 수비수 칼리두 쿨리발리(현 첼시)의 대체자로 영입됐다.

팬들은 반신반의했으나 그는 모든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나폴리에서 만난 팬들은 그를 '사자', '글래디에이터', '한국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빈첸초(45)씨는 "김민재가 세리에A보다 한 수 아래인 튀르키예(터키) 리그에서 왔기 때문에 사실 기대치는 낮았다"며 "그런데 내 생각이 짧았다. 그는 올 시즌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활약하며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민재가 벌써 이적설에 휩싸인 것에 관해 묻자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오늘은 즐거운 날인 만큼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난 4일 우디네세와의 원정 경기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한 나폴리는 하룻밤을 묵은 뒤 이날 오후 4시 나폴리로 돌아왔다.

원래는 경기 뒤 바로 전용기를 이용해 나폴리에 도착하려고 했지만, 대혼란을 우려한 나폴리 당국의 요청에 따라 하룻밤을 더 머무른 것이다.

나폴리로 돌아오는 과정도 복잡했다. 민항기가 도착하는 카포디치노 국제공항이 아닌 그라차니세 군사공항을 택했다.

그라차니세 군사공항이 나폴리 훈련장에서 12㎞ 떨어져 상대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1만여명의 팬은 나폴리 훈련장에 운집해 나폴리 구단 전용기가 착륙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전용기를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훈련장으로 돌아오는 길도 팬들의 집중을 막으려고 선수단이 구단 버스, 택시, 승용차에 나눠 탔다.

팬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훈련장 밖에서 기다리며 응원과 축제를 이어갔지만, 선수들이 다른 출구를 통해 귀가한 사실을 알고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훈련장 정문 근처에서 만난 라바노씨는 "그제부터 오늘까지 사흘 휴가를 냈다"며 "우리의 영웅들을 환영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고 설명했다.

생업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나폴리의 우승을 축하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나폴리가 우승의 한뿐만 아니라 차별의 한을 풀어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를 얕잡아보는 북부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줬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며 "전 세계인에게 이탈리아 남부를 알린 승리"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남북문제(남부와 북부 간 경제력 격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에 비해 낙농업 중심의 남부는 소득 격차가 극심한 편이다.

이로 인해 남부 중심 도시인 나폴리의 팬들이 북부로 원정 응원을 가면 심한 모욕을 당해야 했다.

특히 유벤투스나 인터 밀란, AC 밀란 같은 북부 팀을 상대로 원정을 가면 '이탈리아의 하수구' 같은 소리까지 들었다.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북부 사람들에게 맞서 자존심을 세워준 나폴리가 팬들에게는 그보다 더 고마울 수 없다.

나폴리 팬들은 우승을 축하하면서 켜켜이 쌓인 한과 울분까지 토해냈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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