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두의 꼬치 COACH] “책임감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어요” KGC 최승태 코치

조영두 2023. 5. 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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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조영두 기자] 현재 KBL과 WKBL에는 총 36명의 코치가 각 팀의 감독을 보좌하고 있다. 이중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있는 반면, 선수 시절 다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코치도 있다. 이번 코너에서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당당히 프로팀 코치로 성공한 이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5월호 주인공은 안양 KGC 최승태 코치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짧은 선수생활을 마친 최승태 코치는 사비를 들여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이후 전주 KCC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창원 LG 코치를 거친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안양 KGC에 합류, 김상식 감독을 훌륭하게 보좌하며 정규리그 우승에 힘을 보탰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Q 먼저, 어떻게 농구를 시작하게 됐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우연히 농구대잔치 중계를 보는데 허재 감독님이 나오더라고요. 당시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가 1분 남기고 6점 차로 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허재 감독님이 50초 사이에 8점을 넣으셔서 역전승을 거둔 거예요. 그걸 보고 아버지께 농구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죠.

Q 연세대 시절에는 방성윤, 이정석과 함께 뛰었는데요. 3학년 때 MVP를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1학년 때 (방)성윤이가 없어서 제가 신인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3학년에 MVP를 받았죠. 그 때는 농구가 너무 재밌었어요.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하면 이길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대학 무대에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재밌게 경기를 뛰었던 것 같아요.

Q 3학년을 마치고 얼리 엔트리로 2004년 KBL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 당시 연세대 멤버가 워낙 좋았어요. 그리고 제 개인 사정이 어려웠죠. 프로에 가면 선급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주변에서 다들 농구 잘한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뽑힐 거라고 생각하고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어요.

Q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7순위로 KCC에 입단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무릎 부상에 시달렸어요. 연세대 와서도 양쪽 십자인대가 한 번씩 파열돼서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죠. 부상만 아니었다면 1, 2, 3순위에 뽑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부상을 생각하면 지명 순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죠. 그래도 팀에 조성원, 추승균 선배님과 같은 좋은 분들이 있어서 많이 배웠어요. 그러면서 농구를 보는 시야도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Q KCC에서 두 시즌을 뛰고 LG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제가 신인 시절에 경기를 제일 많이 뛰었어요. 2년 차 시즌을 준비하는데 또 무릎을 다친 거예요. 그래서 LG로 트레이드가 됐죠. 거기서도 1, 2라운드에 식스맨으로 뛰다가 다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해서 더 이상 농구를 못 하겠더라고요. LG에서는 재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저 스스로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어요. 그렇게 임의탈퇴가 됐고, 약 1년 반 동안 방황을 했죠.

Q 임의탈퇴 후 돌아와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데이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는데요?
전자랜드 최희암 감독님께서 저를 불러주셨어요. 그래서 재활을 열심히 했고, 시즌 막판 플레이오프 2경기를 뛰었죠. 이후 김남기 감독님이 원하셔서 오리온스로 트레이드가 됐는데 제가 적응을 잘 못했어요. 그렇게 첫 번째 은퇴를 하게 됐죠.

Q 은퇴 후 2010년 KBL 2군 드래프트에 참가해 서울 SK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농구에 대한 아쉬움이 컸어요. 후회하기가 싫었죠. 그만두더라도 다시 한번 열심히 해보고 싶었어요. 그때 진짜 열심히 했는데 SK 멤버가 워낙 좋았어요. 제가 기회를 못 잡기도 했고요. 시즌 초반에 기회를 받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몸싸움이 겁나니까 제대로 뛰지 못했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그만두게 됐어요.

Q 선수 시절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을 것 같은데요?
어릴 때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농구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동기들이 성장할 때 저는 거꾸로 내려가고 있으니까 거기서 오는 자괴감이 너무 크더라고요.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SK에서 마지막으로 뛸 때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요. 정말 열심히 했으니까요. 선수 시절에 힘들어서 더 공부하려고 노력했고,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진 것 같아요.

Q 만약 부상이 없었다면 어땠을 것 같나요?
그 생각을 진짜 많이 했어요. 아마 어느 정도 잘하지 않았을까요? 국가대표도 해보고, 어린 친구들이 ‘저 선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요. 저 스스로 농구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컸으니까요.

“NCAA 토너먼트에 가게 된 그날,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최승태 코치는 은퇴 후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앨라배마대 버밍엄(UAB) 매니저로 합류했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팀의 코치가 되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14-2015시즌 NCAA 토너먼트 무대를 진출하는 영광을 누렸다. 추승균 전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5-2016시즌을 앞두고 KCC의 코치로 부임했다. 2020-2021시즌부터는 LG 코치로서 조성원 전 감독 밑에서 더욱 많은 경험을 쌓았다.

Q 은퇴 후 사비를 들여 앨라배마대 버밍엄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습니다.
은퇴하자마자 바로 넘어갔어요. 제 여동생이 앨라배마대 버밍엄 대학원을 진학했을 때였거든요. 마침 NCAA 디비전1 소속 농구팀이 있고, 어학원까지 있으니까 저에겐 너무나 좋았죠. 동생이 마침 재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운동부와 교류가 있었는데 미국 도착한 첫날에 무작정 저를 데리고 농구팀 감독님을 찾아갔어요. 훈련 구경만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제가 프로선수 출신인 걸 들으시더니 도와달라고 하셔서 학생 매니저로 들어가게 됐어요.

Q 코치로 승격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매니저 시절 선수들 개인 물병에 얼음 채우고, 수건 챙기고, 훈련 세팅 같은 걸 저 혼자 다 했어요. 훈련 중에 선수들이 넘어지면 뛰어 가서 코트를 닦았죠.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영어 실력이 늘면서 의사소통이 되니까 팀에서 스킬 코치처럼 선수들을 가르쳐주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인 1명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저한테 배우는 선수들이 12명까지 늘어났어요. 이후 대학원에 합격했고, GA(Graduate Assistant) 자격을 얻어 코치가 됐죠.

Q 앨라배마대 버밍엄이 2014-2015시즌 NCAA 토너먼트 64강전에서 강호 아이오와주립대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요?
당시 앨라배마대 버밍엄은 NCAA 디비전1에서 중간 정도의 전력이었어요.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면서 NCAA 토너먼트 출전권을 획득했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우승했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았어요. 연세대 시절 정기전 승리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으니까요.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해본 거잖아요? 64강에서 우승후보 아이오와주립대를 만났는데 업셋을 이뤄냈죠. 정말 기뻤어요.

Q 앨라배마대 버밍엄 코치로 있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처음엔 미국의 문화가 신선했어요. 선수와 코칭스태프 간의 격이 없더라고요. 수직적인 우리나라와 달리 대화와 소통이 더 잘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자유롭다가 훈련 시간이 되면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정해진 룰을 어기는 것에 대해 민감해서 가차 없이 감독이 선수보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미국은 자유롭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훈련 중에는 우리나라보다 더 수직적으로 느껴졌어요.

Q 2015-2016시즌 KCC 코치로 부임하면서 KBL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입단한 팀이 KCC였잖아요? 당시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선배님이 팀의 주축이었어요. 제가 막내였는데 선배님들과 잘 지냈고, 은퇴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미국에 지도자 공부를 하러 간 것도 알고 계셨어요. 선수 시절에 저를 좋게 봐주셨는지 추승균 선배님이 KCC 감독이 되면서 저를 불러주셨죠.

Q 첫 시즌에 KCC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코치가 되고 첫 시즌이라 의욕이 넘쳤어요. 제 나이가 34살이었거든요. 뭣도 모르던 시절이라 우승하니까 마냥 좋더라고요. ‘열심히 하니까 보답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챔피언결정전에서 오리온을 만났는데 운과 분위기가 상대 팀이 더 좋았어요. 시리즈 내내 3점슛 성공률이 60% 가까이 되니까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오리온이 너무 잘했어요.

Q 2020-2021시즌을 앞두고는 LG 코치로 합류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선배님들이 저를 예쁘게 봐주신 것 같아요(웃음). 조성원 선배님이 LG 지휘봉을 잡으셨는데 너무 감사하게도 저를 찾아주시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추승균, 조성원 선배님 덕분에 제가 KGC에서도 코치를 하고있는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에요.

Q LG에서 D리그 전담 코치를 맡았는데 어떤 점을 배웠나요?
경기를 읽고 집중해야 되니까 스스로 더 공부를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KCC에서 처음 D리그를 지휘할 때는 우왕좌왕했어요. 그런 시간을 겪고 나니까 확실히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연차가 쌓인다는 말을 의미를 깨달았던 것 같아요.

“2라운드에 정규리그 우승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어요”
올 시즌을 앞두고 최승태 코치는 김상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KGC 코치로 오게 됐다. 이번엔 막내 코치가 아닌 수석코치였다. 최승태 코치 1982년생, 조성민 코치 1983년생으로 10개 구단 중 코치들이 모두 1980년대 생인 팀은 KGC가 유일하다. 시즌 전 우려의 시선도 있었지만 최승태 코치는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했고, KGC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Q KCC, LG와 달리 김상식 감독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KGC 코치로 오게 됐습니다.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어느 날 김상식 감독님께서 전화가 오시더라고요. 추승균, 조성원 선배님은 같은 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김상식 감독님은 거의 뵙지 못했어요.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이실 때 체육관에서 인사드린 게 전부였죠. 감독님이 전화를 주셨을 때 손이 떨릴 정도로 놀랐어요.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오게 됐어요.

Q 계속 막내코치였다가 수석코치가 됐는데 부담감은 없었나요?
막내코치와 수석코치의 차이가 크더라고요. 처음에 부담이 됐고, 시행착오도 있었어요. 수석코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 몰랐죠. 막내코치였을 때는 제 일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수석코치는 감독님과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도 해야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김상식 감독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아요.

Q 공교롭게도 KGC의 코칭스태프가 모두 슈터 출신으로 꾸려졌습니다.
감독님과 (조)성민이는 전문 슈터였는데 저는 슛을 던지면서 패스를 주는 플레이도 좋아했어요.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의 중간 느낌이었죠. 그래도 슛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코트 위 5명 중 한 명이라도 슛이 없으면 공격 옵션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거든요. 감독님께서도 슈터 출신이셔서 그런지 선수들한테 슛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계세요.

Q KGC가 KBL 역대 3번째 와이어 투 와이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는데 예상했나요?
음, 2라운드에서 팀이 8승 1패를 했어요. 그때 우승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오더라고요. 시즌 전 평가를 뒤집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력이 너무 좋았고, 기복도 없었거든요. 거기에 김상식 감독님의 농구가 점점 입혀지니까 더 무서운 팀으로 변모했던 것 같아요.

Q 지난 3월에는 EASL(동아시아 슈퍼리그) 챔피언스 위크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너무 뜻 깊었어요. KGC가 새로운 코칭스태프 체제에서 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거잖아요.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동아시아에서 잘하는 팀들이 출전했고,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했던 SK를 꺾고 우승했으니까요. 챔피언스 위크를 우승하면서 정규리그 우승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겼어요.

Q 본인만의 철학이 있다면요?
저는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지도자 철학뿐만 아니라 제 인생의 철학이죠. 책임감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선수들한테 이야기를 할 때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거죠. 어느 순간부터 제 인생에서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각인이 됐어요.

Q 선수시절 주목을 받지 못했어도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은데요?
더 잘해서 앞으로 성공해야죠(웃음). 저는 선수로서 빛을 못 봤지만 남들과 똑같이 꿈이 있었어요.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죠. 그걸 바라보고 갈망하니까 길이 보이더라고요. 길이 보인다고 끝이 아니에요. 거기서 더 책임감을 갖고 공부하고 노력해야죠. 계속 두드리다 보면 실타래가 풀리듯이 되는 것 같아요.

Q 앞으로 지도자로서 목표는 무엇인가요?
현재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아직 배울 게 너무 많거든요. 제 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만큼 배우고 나서 기회가 된다면 국가대표 코치, 해외 팀 코치를 해보고 싶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최종 목표는 감독이에요. 제 능력이 되고 기회가 된다면 이뤄내고 싶은 꿈이에요.

▼ 최승태 코치 프로필
생년월일

1982년 8월 23일
신장/체중
189cm/86kg
학력
경인초-양정중-양정고-연세대
선수 경력
2004~2006 전주 KCC
2006~2007 창원 LG
2008~2009 인천 전자랜드
2009~2010 대구 오리온스
2010~2011 서울 SK
지도자 경력
2014~2015 앨라배마대 버밍엄(UAB) 코치
2015~2018 전주 KCC 코치
2020~2022 창원 LG 코치
2022~현재 안양 KGC 수석코치

# 사진_점프볼 DB,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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