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 위주의 아카이빙을 시작합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 같은 장소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서울의 가장 유서 깊은 길을 따라 지어진 건물들인 만큼 세종대로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있습니다. 아마 이를 다 소개하려면 책 열권으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광화문과 조선총독부(중앙청), 숭례문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광화문
광화문만큼 우리 민족의 희노애락을 함께 겪은 건축물이 있을까요.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워진 광화문, 당시의 이름은 그저 ‘정문(正門)’이었습니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세종 재위 때의 일입니다. 그렇게 광화문은 200여 년간 조선의 가장 너른 길을 지키며 위엄 있게 서 있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광화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오자, 광화문 뿐 아니라 온 경복궁의 전각이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광화문은 그 후 270여 년간 터만 지키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며 함께 복원됩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도 광화문의 수난은 끝나지 않습니다. 일제는 경복궁 앞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며 앞을 가로막고 있던 광화문을 건춘문 북쪽(현 국립민속박물관 인근)으로 이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포탄을 맞아 석조를 제외한 목조부분 전체가 소실되기도 합니다. 1968년 박정희 정부는 이 석조를 중앙청 앞으로 이전하고 목조를 복원합니다. 한때 조선총독부로 사용되던 중앙청 앞에 광화문이 놓이는, 다소 이질적인 모습으로 광화문이 다시 세워집니다.
중앙청 건물이 철거되고, 헐린 터의 경복궁 복원 사업이 2006년 시작되면서 광화문도 재복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경복궁 근정전과 축을 맞추고,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던 석조부분을 손보고, 문루를 목재로 복원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2010년 지금의 광화문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조선총독부
경복궁 근정전 앞을 근대 양식의 석조 건물이 놓여 있습니다. 궁의 처마의 곡선과 대비되는 건물의 직선 기둥과 첨탑, 목재와 석조 소재감에서 오는 이질감. 누가 봐도 원주인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의 느낌입니다. 이렇게 1900년대 초 광화문통의 사진을 살펴보면 그 자체로 ‘식민지 강점’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청사가 필요했고, 그리하여 근정전으로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앞뜰을 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합니다. 조선왕조 통치의 상징이었던 경복궁을 가리는 이 거대한 철근콘크리트의 건물을 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자존심을 압도하려는, 청사의 ‘위치 선정’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은 식민지 뿐 아니라 일본 본토를 포함해서도 가장 규모가 큰, 최첨단의 건물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그 시대의 최신 공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건립되었고, 조선에서 세 번째로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었습니다. 건물 내외부를 치장한 장식품들은 대부분 유럽 등에서 들여온 상품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인부들이 매일같이 동원되었지만 공기가 예정보다 5년을 초과해 총 10년이나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큰 공사였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중앙청으로 이름을 바꿔 다용도로 사용됩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는 미군정 청사로도, 국회의사당으로도, 정부청사로도 사용됩니다. 각 기관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며 중앙청 건물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합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철거 논의는 해방 이후부터 여러 번 있었습니다. 때마다 철거비용이나 기술 부족, 반대의 보존 여론 등에 의해 잦아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1995년 제50주년 광복절 당일 총독부 건물 중앙 첨탑 돔을 기중기가 들어 올리며 철거의 시작을 알립니다.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에서 조선총독부 철거를 검색하면 빠지지 않는 내용이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는 멘트와 함께 폭파되어 내려앉는 총독부 외벽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멘트는 총독부 건물 철거가 시작된 이후 일본 고위직의 식민지배 옹호 관련 발언으로 기인한 말입니다. 또한 철거 방식 역시 지근거리에 있는 경복궁에 미치는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각조각 잘라 철거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합니다.
숭례문
숭례문에서 불길이 솟던 밤을 기억하시나요. 화마 앞에서 600년을 이어온 전각은 무력하게 스러졌고, 국민들은 그 모습을 TV화면으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숭례문은 하룻밤 새 석축만 남기고 전소되었습니다.
숭례문은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해 서울 도성 남쪽을 지키던 관문이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기 사진을 보면 숭례문과 성곽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가옥의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만 멀뚱히 남은 지금과는 사뭇 다릅니다.
1900년도 초 숭례문의 사진을 보면 홍예 아래 두 개의 전차선이 지납니다. 숭례문은 도성 안에서 용산 또는 영등포로 이어지는 전차선이 거쳐 가는 통로였습니다. 숭례문이 섬처럼 남은 것은 191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고종 퇴위 이후 일제는 숭례문을 일대 성곽을 없애고 문을 에둘러 전차 선로를 착공합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숭례문은 크게 훼손되지만, 무너지지 않고 버티어 전후 복구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도 이겨낸 숭례문은 2008년 토지보상의 불만을 품은 한 남성의 방화로 전소됩니다.
그 후 5년간 진행된 복구 사업으로 우리는 지금의 숭례문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타고 남은 숭례문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에 더해 사라진 좌우 성곽과 지반 일부도 복원됩니다. 복원 과정에서 단청 부실시공, 원료인 금강송 횡령 등 웃지 못할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2013년 새얼굴의 ‘국보 1호’ 숭례문이 시민들에게 개방됩니다.
세종대로 편을 마치며
사진기자들에게 세종대로는 사계절을 담는 장소입니다. 한여름에는 뜨거운 광화문 광장 위에 누워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지열을 찍기도 하고, 바닥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을 스케치하기도 합니다. 날이 서늘해지는 계절이면 옷깃을 여미고 광화문네거리를 건너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찍습니다.
세종대로, 이 길의 지난 날을 상상해 봅니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임금의 행차를 따르는 행렬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를 오가는 순사들과 인력거들이, 미군정 당시에는 탱크들이 오갔을 것입니다. 민주항쟁 당시에는 이 길 가득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을 것입니다.
제가 카메라 너머로 본 기억도 더해 봅니다. 월드컵 응원 당시 광장을 메운 붉은악마들. 매주 반복되는 수많은 집회들. 언젠가 ‘사람이 모이는 길에서 역사가 생긴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이 길 위에 쌓이는 ‘한 걸음’이 모여 역사가 되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세종대로, 앞으로 이 길에서 어떤 사진을 찍게 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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