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는 아빠가 했잖아…태세전환 이렇게 빠르다고? [세계엔]

황경주 2023. 5. 6.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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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미국을 다녀온 윤석열 대통령과 바통 터치하듯 미국으로 간 대통령이 있습니다.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입니다. 1년 전만 해도 서먹서먹했던 미국과 필리핀 관계가 최근 부쩍 가까워졌는데요. '중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는 모양새입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 안에서도요.
필리핀 독재의 상징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묘사한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 (출처 AP)


■ 미국-필리핀 밀착…중국 경계 '한목소리'

지난 1일(현지 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미국-필리핀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필리핀 대통령이 미국 땅을 밟은 건 10여 년 만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고, 필리핀보다 더 좋은 동반자는 없다"고 표현하며,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미국이 맞닥들인 '새로운 도전'이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점차 커지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거겠죠.

중국이 못마땅하기는 필리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나라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다퉈왔는데, 최근 들어 갈등이 더 심해지는 분위기죠. 지난달 말 필리핀 해역에서는 중국과 필리핀의 해안경비대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필리핀은 지난 3월부터 자국 내에서 미군이 군사기지 4곳을 더 쓸 수 있게 허가해줬습니다. 두 나라는 최근 연합군사훈련도 했는데, 역대 최대 규모였습니다. '중국 경계'라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며 미국과 필리핀이 부쩍 가까워지고 있는 겁니다.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필리핀을 공격하면, 미국이 나서겠다고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코스 일가의 과거 사진. 왼쪽부터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아들), 마르코스 대통령(아버지), 이멜다 마르코스(어머니).


■ 필리핀 독재의 상징 '마르코스'

그런데 이런 바이든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르코스'라는 이름에 있는데요. 필리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죠.

지난해 5월 대통령직에 오른 마르코스 주니어는 1965년부터 20년 넘게 독재 정치를 하다 실권한 아버지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들입니다. 한 마디로 독재 가문의 아들이 다시 국가 정상에 오른 겁니다.

아버지 마르코스 시절의 필리핀은 어둡고 혹독했습니다. 1972년부터 약 10년간 계엄령이 선포됐고, 독재에 반대하던 수천 명이 체포돼 고문 끝에 숨졌습니다. 집권 당시 마르코스 일가가 부정 축재한 재산이 100억 달러(약 13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영부인 이멜다(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어머니)는 8년 동안 매일 다른 구두를 신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1986년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대항한 ‘피플파워(People Power)’ 시민 혁명.


결국, 아버지 마르코스의 독재 정권은 1986년 시민 혁명으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아버지 마르코스는 3년 뒤 숨졌지만, 하와이 연방 법원은 1995년 마르코스 대통령의 인권 침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마르코스 일가가 희생자들에게 20억 달러(약 2조 6천억 원)를 배상하라고 명령한 겁니다.

그렇게 자유와 인권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미국이 이제 와서 인권 탄압의 상징인 가문과 손을 잡는다고 하니, 이에 대한 비판이 뒤따르는 겁니다.

■ '팬케이크 뒤집는' 바이든 마음?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은 필리핀 독재 정치의 실태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상원의원이던 1980년대에는 아버지 마르코스를 비판했고, 마르코스 일가가 하와이로 망명한 뒤에는 이들을 보호하려던 당시 레이건 정부를 향해서도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당시 의회 기록에 나온 바이든의 말을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패한 정권과 같아진다면, 단기적으로는 기반을 유지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잃게 될 것입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2023년 5월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


이랬던 바이든의 최근 태세전환은 재빠릅니다. 지난해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바이든 대통령은 바로 축화 전화를 걸었습니다. 필리핀 전임 대통령인 두테르테는 '친중 반미' 성향이라,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까다로웠거든요.

바이든과 마르코스 주니어는 지난해 9월 유엔총회에서 처음 마주했는데, 이때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국이지만 험난한 시기를 보냈다"며, "우리가 함께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데 절실한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르코스 가문은 법적으로 미국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신세지만, 바이든 정부는 이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해줬습니다. 마르코스 가문은 하와이 법원의 피해자 배상 판결을 어기고 자산을 불법 매각해 미국에서 체포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하지만 "국가 원수는 외교적 면책 특권이 있다"며, "마르코스 주니어는 미국에서 환영받을 것"이라고 감싸줬죠.

■ "독재 가문에 구애" 비판

WP는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필리핀 독재 가문'에 구애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이 마르코스 일가에 면죄부를 주고, 독재에 책임을 묻고자 하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는 겁니다.

WP는 한 전문가를 인용해 "미국은 미군의 문지기로서 마르코스 주니어가 필요하고, 마르코스 주니어는 권력 유지와 외교적 면책을 위해 미국이 필요하다"고 짚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마르코스 주니어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날 권력자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지난달 26일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 군사 훈련을 참관하는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가운데)


이런 비판에도 미국의 최우선 과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확장을 막는 것입니다. 한국과 필리핀 정상을 잇달아 만난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일본과 호주도 순방할 예정입니다. 눈 앞의 이익 앞에서 과거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과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숨 쉬고 있습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유엔(UN)을 방문한 지난해 9월, 필리핀계 미국인들은 워싱턴과 맨해튼으로 모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절대 잊지 않는다', '반복은 없다'고 쓴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바이든과 미국의 현재는 어떤 과거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될까요.

황경주 기자 (rac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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