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⑳ 출생신고까지 8년…미혼부의 아이는 어디로 갔나

임세원 기자 2023. 5. 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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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미혼부 출생신고 어려운 헌행법에 '헌법불합치'
"혈연 인정 '인지제도' 고쳐 아빠될 권리까지 손봐야"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김지환 '아빠의 품' 대표와 딸 사랑이의 뒷모습 (김지환 대표 제공)

(서울=뉴스1) 임세원 기자 = 결혼하지 않은 아빠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출생신고를 못한 아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법과 제도로는 ‘없는 아이’다.

상현이(가명)가 그랬다. 상현이는 여덟살이 돼서야 가까스로 출생신고를 했다. 그동안 상현이는 건강보험에 들지 못해 5만원이나 내고 감기약을 처방받았다.

상현이를 제 나이에 입학시키기 위해 아빠 정모씨(46)는 주거지가 일정하고 아이가 동네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증명할 서류를 잔뜩 준비해 교장과 수없이 상담해야 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3일 미혼부의 출생신고를 제한하는 가족관계등록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세상의 상현이들이 자신을 증명하는 데에 들인 시간과 노고를 줄일 수 있게 됐다.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 홈페이지에서 출생신고를 하는 모습. 혼외자를 출생신고할 경우 신고인이 친모가 아니면 기타로 분류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의 신고는 불수리 처리된다는 안내창이 뜬다. (홈페이지 갈무리)

◇ 엄마 중심 가족관계등록법…‘사랑이법’으로도 역부족 결혼하지 않은 미혼부는 원칙적으로 자녀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가족관계등록법 46조2항에 혼인 외 자녀의 출생신고를 생모만 할 수 있게 돼있다.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면 자연스럽게 친자관계가 증명되지만 남성은 유전자 검사를 거쳐야 혈연관계가 증명되기 때문이다.

미혼부가 가족으로 인정받으려면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인지’ 제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생모의 동의 없이는 자녀와 자신과의 혈연관계를 밝히고 인정받는 ‘임의인지’를 할 수 없고 소송으로 ‘강제인지’를 한다고 해도 엄마가 협조하지 않으면 인정받기 어렵다.

미혼부 혼외자의 가정은 다양하다. 결혼을 전제로 임신했지만 출산 후 떠난 경우, 여성이 전 남편에게 폭력을 당했으나 정식 이혼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도망 나와 다른 남성과 임신 출산한 경우 등이 해당한다.

미혼부 네트워크 '아빠의 품' 대표 김지환씨(46)는 전자에 해당한다. 딸 사랑이와 합법적 가족이 되기 위해 16개월이나 재판을 했다. 사랑이가 스스로 자신의 성과 본을 창설해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든 다음 유전자 검사 결과로 두 사람이 혈연관계라는 인지청구 소송을 했다.

상현이 아빠 정씨는 후자였다. 정씨는 상현이가 아내의 전 남편 자녀가 아니라는 소송(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을 거친 다음 유전자 검사로 두 사람이 혈연관계라는 인지청구 소송을 내 4년8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2015년 2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사랑이법)이 통과돼 첫 번째 변화가 있었다. 미혼부가 유전자 검사로 자녀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계는 뚜렷했다. 미혼인 생부가 출생신고를 하려면 생모의 성명, 등록기준지, 주민등록번호를 모두 다 몰라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적었고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설령 어렵게 증명한다고 해도 가정법원에서 긴 재판을 거쳐야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2021년 2월 사랑이법이 또 한 번 개정됐다. 생모가 필요한 서류 발급에 협조하지 않아도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난한 재판을 거쳐야 했고 민법상 친생자추정조항에서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공동취재) 2023.4.4/뉴스1 ⓒ News1 허경 기자

◇ 대법·헌재 “모든 아동에 ‘즉시 출생 등록될’ 기본권 있어”

변화는 대법원에서 시작됐다. 출생신고 의무자의 자격을 다룬 기존 논의와 달리 출생등록 자체를 태어난 아동 고유의 권한으로 보기 시작했다. 2020년 6월 대법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를 가진다"며 "이는 법 앞에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이므로 법률로도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헌재는 2023년 3월 ‘출생 등록될 권리’가 아동의 기본권이라는 대법원의 결정을 재확인했다. 헌재는 "출생등록은 개인의 인격을 발현하는 첫 단계이자 인격을 형성해 나아가는 전제”라며 "태어난 즉시 출생등록이 되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동으로서는 이러한 관계 형성의 기회가 완전히 박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행법이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의 즉시 출생 등록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기혼 여성이 혼외자가 생겼을 경우 친생자추정원칙에 의해 출생신고는 생모와 그 남편이 해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럴 가능성이 작고 나아가 생모가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출생신고를 꺼릴 수 있어 아이의 출생등록이 실효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날 결정에 김지환 대표는 “법 개정이 늘 친생자 추정 조항에서 막혔는데 이 법과 충돌할 수 있어 반신반의했다”며 “가족관계등록법이 헌법의 근간을 흔드는 것 아니냐는 내 주장이 맞았다"고 환영했다.

청구인 중 한 명인 정씨는 “출생신고가 안돼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인정받은 듯했다”며 “진작에 바뀌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김지환 '아빠품' 대표와 함께 미혼부 출생신고법(사랑이와 해인이 2법) 통과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1.1.24/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 미혼부의 ‘아빠 될 권리’는?…“인지제도 손보고 사각지대 없애야”

헌재 결정으로 누군가의 억울한 시간이 짧아질 수 있게 됐다. 이제 미혼부도 자녀의 출생신고를 위해 오랜 법정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2025년 5월31일까지 현행법을 개정하라는 헌재의 주문에 따라 박광온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지난달 25일 발의한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에서는 아동이 태어난 즉시 등록될 수 있는 조항이 추가됐다.

개정안은 혼인 중인 생모가 아이 아버지의 정보를 기재하지 않고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했다. 또 생모나 그 남편이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유전자 검사로 확인된 생부가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했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아이가 출생신고에서 누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빠의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청구인 측 정훈태 변호사는 “아동 중심으로 최대한 빨리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한 것은 고무적”이라면서도 “생부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지만 아빠로 인정될 수 있는 ‘인지’에 관한 조항은 없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아빠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해도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아빠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아빠는 보육료 지원이나 한부모 가족을 위한 복지제도뿐 아니라 보호자의 자격도 없어 수술 동의조차 할 수 없다.

정 변호사는 “헌재 판결이 아이의 출생 등록 권리는 인정했지만 생부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가족관계등록부 기준으로 제도가 형성되므로 누구의 자식으로 들어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며 “생부가 아빠의 권리를 다할 수 있게 임의인지를 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미혼부 가정이 다양한 만큼 사각지대를 넓히는 데 힘써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지환 대표는 “해외에서 태어난 혼외자 아동은 국내에서 출생신고를 해준다고 해도 국적이 없어 입국조차 못한다”며 “법안 발의 때 다양한 상황을 보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say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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