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처녀 겁탈한 야수들…세상사람 벌벌 떨게한 이들의 정체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5. 6.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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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땅과 딸을 줄 테니 약탈을 그만둬 주게.” 잉글랜드 소왕국들은 바이킹들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사진은 드라마 바이킹스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야만의 민족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재물을 약탈했고, 마을 처녀들을 앗아갔습니다. 잊힐 즈음이면 다시 떼거리로 나타나 학살을 일삼았지요. 전투에 나갈 때는 늘 마약에 취해있었습니다.

광분의 상태로 겁 없이 싸우는 모습은 야수와 같았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고, 왕궁과 초가도 구분 없이 태웠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바다의 늑대”라고 불렀습니다. 바이킹 이야기입니다.

여기 또 다른 고도 문명을 자랑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기술에 뛰어난 이들의 항해술은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합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거뜬히 누볐고, 태평양도 건너는 데 성공합니다. 사회적 수준도 대단합니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상속의 권리가 있습니다. 높은 기술력으로 유럽 전역을 뒤흔든 이들의 이름, 역시 바이킹입니다.

뿔 달린 투구를 쓰고 거칠게 약탈하는 이교집단. 우리가 아는 바이킹의 편린입니다. 대중문화가 그린 그들의 모습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바이킹의 역사를 다시 사색합니다. 6일 대관식을 치른 영국 왕 찰스 3세가 바로 ‘바이킹’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군주제의 표상인 영국의 왕실이 야만족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영국 국왕 찰스 3세가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불현히 튀어나온 바이킹...왜?
바이킹은 8세기 무렵부터 역사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8세기 북유럽 날씨가 온화해지면서(Medieval warm Period) 농사가 잘되기 시작하자,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거든요.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늘어난 사람들을 부양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만 한 상황에 놓여있던 것이었지요.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까지 약탈할 정도로 전 유럽을 공포에 빠뜨립니다.

바이킹들이 유럽을 침공하는 모습을 묘사한 12세기 삽화.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바이킹들이 ‘여자사냥’을 나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따뜻한 기후로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돈 많은 지주들이 ‘일부다처제’로 여성을 독식하게 되었지요. 돈 없고 힘 없는 농민들이 여성을 찾아 해적질을 시작했다는 분석입니다. 바이킹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벤 라필드는 “바이킹 남성들이 여성을 포획해 아내나 첩으로 삼기 위해 약을 나갔다”고 이야기 하는 배경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최강의 전사가 되었나
“그들은 무시무시한 늑대마냥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바이킹은 당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습니다. 유럽 전역을 흽쓸어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러시아 동부까지 침략에 성공했을 정도입니다.

이들이 유럽을 호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만의 신앙이 자리합니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무엇보다 전사의 ‘호전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전투에서 싸우다 죽은 이들은 그들의 신인 오딘·토르와 함께 발할라라는 천국에서 만찬을 즐길 수 있다고 믿었지요.

“진정한 전사만이 발할라에 들어올 수 있지”. 에밀 도플러가 1903년 그린 발할라의 모습. 늑대 옆의 남자가 주신 오딘이다.
심지어 여자들도 방패여전사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함께 했습니다. 그만큼 전장에서 ‘전사’하는 건 바이킹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전장에서 천하무적일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신들린 전투를 보이는 광전사 베르세르크 같은 사람들도 바이킹의 경쟁력이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을 입고 자신의 방패를 물어뜯으며 미친듯이 싸웠지요. 경련, 치아 떨림, 오한에 떨면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은 맹수나 다름없었습니다.

바이킹 유적지에서는 여자 전사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다. 사진은 드라마 바이킹스에서 전투에 나선 여성 전사. <사진 출처=IMDB>
고대 체스말에서 묘사된 바이킹 광전사. 이로 방패를 물고 눈을 희번득한 모습이 영략없는 광인이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광전사’들의 비밀은 마약이었습니다. 후대 과학자들이 1970년대 바이킹 무덤에서 ‘사리풀’을 발견합니다. 당시 환각작용을 유발하는 식물이었습니다. 전투에 앞서 이를 섭취했기 때문에 겁 없이 전장에서 적에게 달려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국가로 발돋움하는 바이킹들
“우리 땅에서 살게, 다만 조건이 있네.”

바이킹은 약탈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국가의 모습을 갖춰갑니다. 8세기부터 200년 동안 계속된 약탈에 유럽 왕조들은 대응에 나섭니다. 무력으로는 덩치가 크고, 기동력이 빠른 바이킹에 맞설 수 없었으니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소왕국들은 ‘당근’을 제시합니다. 우리 땅에서 살아도 좋으니 약탈만큼은 그만 해 달라는 ‘읍소’였지요. 이 지역은 덴마크 바이킹 사람을 일컫는 말에서 따와 ‘데인로’ 라고 불립니다. 잉글랜드 복판을 야만족의 땅으로 만들어준 것이었지요. Husband(남편), Leg(다리), Skin(피부), Window(창문)와 같은 노르만족들의 단어가 이때 영어에 자리를 잡습니다.

845년 파리를 포위한 바이킹의 긴 배를 묘사한 그림. 바이킹은 유럽 전역의 수도를 위협할 정도로 약탈을 자행헀다. 19세기 작품.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왕 샤를 3세 단순왕이 911년 덴마크 바이킹 부족 두목 롤로에게 회담을 요청합니다. 프랑스 북서쪽 땅을 떼어주고 귀족 작위를 내리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대신 침입하는 바이킹들을 좀 막아달라는 요구를 덧붙였지요. (생클래르쉬레프트 조약)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는다는 서유럽판 이이제이. 이 땅은 그 이후로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땅, ‘노르망디’라고 불렀습니다.

롤로는 이제 엄연한 프랑스의 귀족이었습니다. 바이킹으로서 살던 과거를 잊고 새 출발을 해야 할 시점이었죠. 롤로의 자손은 노르망디 공작으로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유럽 문명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1066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프랑스의 신하...잉글랜드의 왕이 되다
1066년, 유럽에 변혁이 일어납니다. 롤로의 고손이자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가 승하하면서 왕의 처남인 해럴드와 윌리엄 1세가 격돌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르망디의 진정한 주인이라네.”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바이킹 ‘롤로’의 동상. <저작권자=Michael Shea>
해럴드는 재빨리 왕위를 차지했지만, 윌리엄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윌리엄이 누구입니까. 용맹한 바이킹의 후손입니다. 헤이스팅스에서 전투를 통해 거뜬히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잉글랜드의 지배자로 떠오릅니다. 바이킹의 후손들이 프랑스의 공작에서 잉글랜드의 왕까지 거머쥔 순간이었지요.

잉글랜드의 역사에는 부침이 있었지만, 왕조의 핏줄만큼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영국의 새 왕으로 6일 대관식을 치른 찰스 3세 역시 윌리엄의 후손인 이유지요. 왕족 중의 왕족으로 통하는 영국의 왕 역시 그 시작은 야만족(바이킹)이었던 셈입니다. (찰스 3세가 그래서 밉상인 걸까요.)

프랑스 바이외 테피스트리 박물관에 전시된 헤이스팅스 전투의 테피스트리. 길이 70m에 달하는 대작이다. 정복왕 윌리엄이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작품.
영국과 프랑스의 천년 갈등이 시작된 배경
노르만 왕조가 막을 올립니다. 역사는 늘 그렇듯 쉽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땅에서는 왕이었지만, 노르망디 땅에서는 여전히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요. 영지에서만큼은 봉신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충성 맹세 서약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서약을 오마쥬라고 불렀지요. (존경하는 감독의 핵심 요소를 다시 인용해 존경을 표하는 영화계 은어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나도 한 나라의 왕인데...분하다.” 1286년 프랑스의 필립 4세(왼쪽 파란 옷)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1세로부터 오마쥬를 받는 모습.
자존심이 보통 상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로서 예를 갖춰야 한다니요.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노르망디 땅을 포기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잉글랜드 땅 전체보다 프랑스에 가지고 있는 공작령에서 더 많은 세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양국은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프랑스는 “신하로서 예를 지키라”고 강요했고, 잉글랜드는 “나 또한 일국의 왕이다”라고 들이받았지요.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의 씨앗이 이때 잉태된 것이었습니다.

백년전쟁의 전투 중 하나인 1346년 크레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400년대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된다.
당대 최고의 항해자 바이킹
바이킹은 당대 최고의 항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최초로 발견한 이들이었지요. 이뿐인가요. 유럽인 최초로 아메리카 땅에 밟은 것도 바이킹이었습니다. 986년, 바이킹이었던 붉은털 에릭이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그의 아들 레이프는 더 서쪽으로 나아가 기어코 아메리카에 도달합니다. 그곳을 빈란드라고 이름 짓죠(1021년).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것이습니다.
“아메리카다~ 콜럼버스 이겼다.”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가 1893년 그린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바이킹.
물론 원주민과의 알력에서 패배해 아메리카 대륙을 일찍 떠나야 했지만, 그가 최초의 아메리카 발견한 유럽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 고고학팀은 당시 바이킹족들의 배를 복원해 무동력으로 대서양을 건너는 실험을 하면서 바이킹의 힘을 다시 한번 증명하기도 했지요.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바이킹 유적.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저작권자=Dylan Kereluk from White Rock, Canada, 사진출처=Flickr>
선진문화도 그들의 경쟁력이었다
지금 봐도 진보적으로 보이는 문화가 이들에겐 있었습니다. 아이슬란드를 처음 발견한 바이킹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이견을 대화로 조율합니다. 해마다 한 번씩 자유민들이 모여 분쟁을 해결하고 법과 규칙을 제정했지요. 이를 ‘알씽’(Alth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의회제도의 원시적 형태로 여겨집니다. 아이슬란드의 의회가 여전히 알씽으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지요.
아이슬란드 국회의사당에서 의회(알씽) 회의가 열리고 있다. 바이킹 자유민들의 회의에서 알씽이란 용어가 나왔다.
바이킹들의 여성 인권 또한 당대에서는 수준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전사도, 사제도 될 수 있었지요. 남편과의 잠자리가 맘에 들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나 형제가 사망하면 가장의 자리도 물려받을 수 있었고요.
현대문명에도 바이킹은 흔적을 남겨
오늘날 우리 현대 문명에도 바이킹의 흔적은 여럿 남아 있습니다. 덴마크 지역을 통일하고 노르웨이까지 지배한 왕이 있었지요.

그 이름은 하랄드 블루트스. 그는 블루베리를 즐겨 먹은 탓에 치아가 파랗게 변색했지요. 별명은 파란치아를 뜻하는 ‘블루투스’였습니다. 오늘날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 블루투스가 여기서 기원했지요. 여러 나라를 통일한 바이킹 하랄드처럼 여러 전자제품의 무선규격을 통일시키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하랄드 블루투스가 960년 세례를 받는 모습을 묘사한 청동상.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마감하는 오늘은 화요일입니다. 수목금을 버티면 다시 주말이 찾아옵니다. 수요일(Wednesday)은 오딘, 목요일(Thursday)은 토르, 금요일(Friday)은 프레이야의 날이라는 뜻에서 생겼습니다. 모두 북유럽 신화에 주신들이지요. 주말을 기다리는 과정조차 우리는 바이킹과 함께인 셈입니다.
바이킹은 우리의 생각보다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존재다. 유럽을 파괴함과 동시에 창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은 드라마 ‘바이킹스’의 한 장면. <사진 출처=IMDB>
<네줄요약>

ㅇ바이킹은 8세기부터 약탈을 시작해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ㅇ이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아메리카 땅을 가장 먼저 밟은 유럽인이었다.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섰다.

ㅇ바이킹의 후손인 윌리엄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를 침범해 노르만 왕조를 개척했다. 찰스 3세 역시 윌리엄의 피가 흐르고 있다.

ㅇ영국 왕실도 야만족 바이킹의 후손이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

<참고문헌>

ㅇ폴 쥠토르, 정복왕 윌리엄-노르망디 공작에서 잉글랜드 왕으로, 글항아리, 2020년

ㅇ라스 브라운워스, 바다의 늑대-바이킹의 역사, 에코리브르, 2018년

ㅇ김동섭,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책미래,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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