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왜 푸틴을 부러워했나[책과 삶]
‘스트롱맨 시대’의 서막
더 스트롱맨
기디언 래크먼 지음·최이현 옮김|시공사|408쪽|2만1000원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첫 문장으로 꼽힌다. 러시아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등 대문호의 나라이고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나라이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나라이기도 했다. 현재의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나라’다. 푸틴은 집권한 지 20년이 넘었으며 지난해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의 지정학적 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푸틴의 등장은 21세기 국제정치를 휩쓴 ‘스트롱맨 시대’의 예고편이었다. 푸틴이 첫번째 도미노칩을 쓰러트리자 튀르키예, 중국, 인도, 헝가리, 영국, 미국 등에서 줄줄이 ‘스트롱맨’의 집권이 이어졌다. 푸틴의 권위적이고 무자비한 통치 스타일은 다른 나라의 야심가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인도의 모디 총리 등 아시아의 신흥 강대국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심장’과도 같은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보리스 존슨 전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이들은 개인숭배 조장, 법치주의 무시, 민족주의 정치,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조장, 포퓰리즘 등의 내용을 공유하며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탄압하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보인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하며 전쟁도 일으킨다. 경제적 위기와 인종·민족 간의 갈등이 이들의 부상 배경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21세기 국제정치 버전으로 다시 써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행복한 국가는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국가는 모두 비슷한 이유(스트롱맨) 때문에 불행하다.”
<더 스트롱맨>의 저자 기디언 래크먼은 21세기를 ‘스트롱맨의 시대’라고 말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외무 담당 수석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워싱턴, 브뤼셀, 방콕 등에서 특파원으로 일했다. 외교 전문 언론인으로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노련하게 꿰뚫으며 자신이 직접 만나고 취재한 ‘스트롱맨’의 면모를 생생하게 전한다.
세계 인구의 약 40%를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 모두 스트롱맨이 장악했다. 트럼프는 여전히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2024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이끌어낸 영국의 보리스 존슨,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등 아시아·유럽·중남미 대륙 등 거의 전 세계 강대국들에서 스트롱맨이 권력을 잡았다.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2020년에 세계 자유가 15년 연속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5년 이후 해마다 정치적·시민적 자유가 증가하는 나라보다 감소하는 나라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스트롱맨’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졌던 독재정권의 폭력성을 너무도 잘 안다. 저자가 한 줄에 꿰어 보여주는 세계 정치의 지형을 보면, 위협받는 민주주의의 지도가 그려지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책은 인상적인 일화로 시작한다. 2018년 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준비로 바쁘던 백악관에서 한 보좌관이 저자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대통령께서는 권위적인 지도자들과 대면 회담하기를 좋아하십니다.” 미국과 북한은 정치체제의 스펙트럼에서 양극단에 있으며 적대적인 관계지만 두 사람은 ‘스트롱맨’으로서 공통점을 공유했고, 트럼프는 이 점만은 마음에 들어한 듯하다.
권위적·무자비·민족주의·보수·포퓰리즘
음모론·차별로 무장한 특유의 통치 스타일
저자는 스트롱맨의 통치 방식을 네 가지로 꼽는다. 개인숭배 조장과 법치주의 무시, 엘리트가 아닌 진짜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포퓰리즘), 공포 및 민족주의 정치다. 개인숭배는 권위주의 국가뿐 아니라 민주국가에서도 나타난다. 시진핑은 ‘시진핑 사상’을 중국공산당 헌법에 넣으며, 마오쩌둥 이후 최초로 자신의 사상을 헌법에 넣은 권력자가 됐다. 주석 임기 제한을 철폐하며 종신집권을 가능케 했다. 인도의 모디는 ‘힌두교 영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기념비적 건축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얼굴을 새긴 위성을 발사했다.
스트롱맨들은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해 사법부를 통제한다.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 폴란드의 카친스키 집권당 대표는 사법부를 통제하려 법률을 개정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도 대법원을 측근으로 채웠다. 튀르키예 에르도안은 계엄령 선포 후 4000명이 넘는 판사와 검사를 숙청했다. 포퓰리즘 또한 이들의 주요 전략이다. 엘리트 집단에 맞서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음모론을 이용한다. 비밀스럽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의미하는 ‘딥 스테이트’ 음모론은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 만들었고, 트럼프도 요긴하게 써먹었다. 영국의 존슨 또한 딥 스테이트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방해하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했다.
문화적 보수주의자인 이들은 가족, 성차별, 성적 취향 등에서 전통적 가치관을 지지하며 동성애 혐오를 적극 이용한다. 푸틴은 ‘동성애 선전’ 금지법을 제정하고 동성애를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 시진핑은 ‘여자 같은’ 남자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못하게 했다. 주요 정치 기반은 소도시와 농촌 거주자들이다. 도시 엘리트를 비판하며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경제위기로 임금 정체와 생활수준 하락을 경험한 이들은 스트롱맨이 말하는 ‘다시 위대하게’ 슬로건에 끌린다. 민족적·인종적 갈등을 적극 이용하며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를 자극해 지지 기반으로 삼는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지속된 경기침체,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서구 지배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것은 스트롱맨 태동의 배경이 됐다. “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상승하는 기대감이 추동하는 반면, 서구의 민족주의는 좌절과 희망이 추동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진핑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빈살만 같은 독재권력과 민주사회에서 선출된 트럼프와 모디를 양극단에 놓고, 그 가운데에 정적을 감옥에 가두고 장기집권을 할 수 있지만 언론과 선거제도 같은 민주적 장치의 제약을 받는 푸틴과 에르도안을 놓는 ‘스트롱맨의 스펙트럼’을 그려 보인다.
2000년 러시아에서 푸틴이 권좌에 앉으면서 스트롱맨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러시아 경제는 위기였다. 1999년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이전보다 4년 단축돼 58세까지 떨어졌다. 배경엔 빈곤율, 실업률 증가가 있었다. ‘좋았던 시절’로 시간을 되돌리겠다고 약속하는 강한 지도자는 매력적이었다. 푸틴은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목표로 2008년 조지아 군사개입, 2014년 크름반도 합병, 2015년 시리아 파병,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감행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맞섰다.
저자는 ‘푸틴주의’는 서방으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하는 것과 무관하며 푸틴과 러시아의 엘리트 집단이 부를 축적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분석한다. 상류층의 부패와 범죄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2016년 공개된 ‘파나마 페이퍼스’는 푸틴과 최측근들이 20억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고 했다. 푸틴의 정적인 나발니가 러시아 공항에서 체포되기 전 공개한 흑해 연안의 푸틴 궁전은 엄청나게 크고 화려했다.
푸틴은 러시아 헌법을 개정해 6년 임기 대통령직을 두 번 더 맡을 수 있게 됐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한다면 스탈린보다 더 오랫동안 러시아를 통치한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스트롱맨 리더십을 훼손하고 심판대에 올렸다.
미국과 러시아는 적대적 관계이지만, 푸틴과 트럼프는 닮았다. 트럼프가 당선되기 몇년 전부터 미국에서도 1990년대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절망사’가 증가하고 있었다. 1999년과 2014년 사이 미국의 교육받지 못한 백인 노동자의 사망률이 22% 증가했다. “알코올 중독과 간 질환, 헤로인과 처방받은 약물 남용, 자살 등이 급속히 확산”된 결과였다. ‘절망사’가 많은 사회집단 중 상당수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았다.
시진핑·모디·에르도안… 전세계 스트롱맨
트럼프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앞으로 30년간 지속될 수도”
확립된 정치 제도·관행으로
‘민주적 통제’의 믿음을 묻다
인도의 모디가 무슬림에 대한 힌두교도의 두려움을 이용했듯 트럼프도 인종·민족 간 갈등을 이용했다. 이민자들이 ‘백인이 세운 미국’을 위협한다며 미국·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려 하고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전면 금지하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트럼프가 푸틴과 시진핑, 에르도안 등 독재자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시진핑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으며 신장에 강제수용소를 지은 것을 두고 “옳은 일 같으니 계속 추진하라”고 말했다. 저자는 트럼프가 ‘독재자 앓이’를 했으며 법적·제도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그들을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실제 트럼프는 2020년 자신이 패배한 대선 결과를 부정했으며,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은 의회의사당을 습격했다. 트럼프 역시 다른 스트롱맨들의 부러움을 샀다. 영국의 존슨은 브렉시트를 추진하면서 “트럼프에 대한 존경심이 커지고 있다. 그라면 집요하게 추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영국과 미국엔 민주정치를 통해 확립된 제도와 정치관행이 있었다. 영국 대법원이 존슨이 브렉시트 추진을 위해 의회를 정회한 것에 대해 불법 및 무효로 판결한 날, 미국 하원은 트럼프에 대한 탄핵 절차를 발표했다. 저자는 “트럼프 재임 기간의 이야기들은 여러 면에서 스트롱맨 통치와 미국의 법과 제도, 선례 등으로 확립된 민주적 통제 사이의 투쟁사”라고 말한다.
저자는 러시아에서 시작해 중국, 인도를 거쳐 서방세계의 핵심부 영국, 미국을 지나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스트롱맨을 거친 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스트롱맨과 싸우고 있는 메르켈과 마크롱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저자가 유기적으로 엮는 이야기의 흐름은 매끄러우며, 각국의 정치상황과 스트롱맨들의 전횡이 잘 그려진다. 그 와중에 트럼프가 독재자들을 칭찬하고 부러워한 이야기는 감초같이 등장한다.
저자는 스트롱맨 시대가 앞으로 30년간 지속될 수 있다고도 다소 어두운 전망을 내놓는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세계 각국이 협력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에서 보듯 국제협력은 어려운 일이 됐으며, 국제사회는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스트롱맨 시대가 끝날 무렵이면 환경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스트롱맨의 장기집권이 끝나면 정치적 불안정이 초래될 위험도 우려된다. 저자는 말한다. “스트롱맨 통치는 자체 결함을 가진 불안정한 정부 형태다. 그러나 ‘스트롱맨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까지 수많은 고통과 혼란이 따를지 모른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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