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야 영화야…데드풀이 인수한 5부리그 ‘렉섬’의 승격 스토리

박강수 2023. 5. 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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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 기자의 인, 플레이] 레이놀즈와 맥일헨리
데드풀 코스튬을 차려 입은 팬이 지난 2일(현지시각) 영국 렉섬에서 열린 렉섬AFC의 내셔널리그 우승 퍼레이드에 참석해 환호하고 있다. 렉섬/EPA 연합뉴스

“내셔널리그로 강등된다는 건…(숨을 들이마신 뒤) 축구의 연옥(purgatory) 같은 것이죠.”

다큐멘터리 <웰컴 투 렉섬>(2022)에 나오는 내레이터의 방백이다. 단테의 서사시 ‘신곡’ 등에 등장하는 연옥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애매한 곳, 적당한(?) 죄를 지은 이들이 속죄에 매진하는 중간계를 가리킨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잉글랜드 축구 5부 리그인 내셔널리그는 프로와 세미프로가 교차하는 애매한 곳, 즉 연옥이다. 연옥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두 갈래 뿐이다. 천국으로 올라서거나(4부로 승격), 지옥으로 떨어지거나(6부로 강등).

잉글랜드의 축구 생태계는 승강제에 기반한 피라미드 꼴이다. 최상단에는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주관하는 최상위 리그 프리미어리그(EPL)가 있고, 그 밑으로는 잉글랜드 풋볼리그(EFL) 산하의 챔피언십(2부), 리그 원(3부), 리그 투(4부)가 자리한다. 여기까지가 프로리그이고 6부부터는 세미프로에 지역리그다. 내셔널리그(5부)는 그 사이 경계선이다. 24개 팀이 맞붙고 승격은 두 자리, 강등은 세 자리다. 천국과 지옥 사이, 이곳에선 매년 사생결단이 벌어진다.

가장 최근 이 악다구니를 탈출한 팀은 렉섬이다. 2022∼2023 시즌 46경기를 치러 34승9무3패로 승점 111점을 찍고 리그 선두로 플레이오프 없이 승격을 결정지었다. 렉섬이 이곳에 갇혀 있던 기간은 약 15년 . 리그 소속팀 중 가장 길었다. 20세기 한때는 잠시 챔 피언십 (2부)에서 자웅을 겨루기도 했던 렉섬은 지긋지긋했던 5부 리그 공기와 작별했고, 웨일스 북동부 소도시 렉섬의 6만5000여명 주민 뿐 아니라 전세계의 축하를 함께 받았다.

축하 퍼레이드에 모여든 렉섬의 팬들. 렉섬의 유니폼 스폰서인 틱톡의 로고가 보인다. 렉섬/EPA 연합뉴스
축하 퍼레이드에 모여든 렉섬의 팬들. 렉섬/AP 연합뉴스

렉섬은 ‘월드클래스’ 구단이다. 2년 전 겨울, 미국의 최장수 시트콤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으로 유명한 배우 롭 맥엘헨리가 마블의 히어로 영화 <데드풀>의 주인공 라이언 레이놀즈를 꼬드겨 렉섬을 인수했다. 의중을 알 수는 없었지만 헐리우드 스타가 내민 손길은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재정난에 허덕이던 영세 구단에 구원이나 진배 없었다. 북미의 ‘히어로’들이 렉섬을 디즈니 동화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뒤따랐다. 유니폼 스폰서는 지역의 중소 제조업체에서 틱톡으로 바뀌었고, 사령탑에는 3∼4부의 승격 청부사 감독(필 파킨슨)을, 최전방에는 전 시즌 리그 투를 정복했던 득점왕 공격수(폴 멀린)를, 최후방에는 잉글랜드 대표팀 출신 골키퍼(벤 포스터)를 데려왔다. 경쟁자들은 상상하기 힘든, 헐리우드 프리미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업그레이드다. 언뜻 15년 전 만수르가 맨체스터 시티를 사들였을 때를 보여준 ‘머니 파워’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여기에 레이놀즈와 맥일헨리는 조금 더 영리하고 결정적인 마케팅 전략을 가미했다. 인수부터 승격까지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스트리밍하는 것이다. 렉섬의 드라마는 상품이 되어 디즈니플러스 같은 플랫폼에 납품됐고, 지역 커뮤니티의 일상을 브랜드화한 <웰컴 투 렉섬> 시리즈는 다국적 팬덤을 구축해냈다. 자본력과 기획력이 맞아떨어지면서 렉섬은 올해 실제로 승격 동화를 써냈고, 이 아름다운 결말은 올해 하반기 시즌2를 통해 공개된다.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왼쪽에서 둘째)가 지난 2일(현지시각) 영국의 렉섬에서 렉섬AFC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잉글랜드 풋볼리그(EFL) 4부리그로 승격을 축하하는 버스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렉섬/EPA 연합뉴스
배우 롭 맥일헨리(왼쪽 아랫줄에서 둘째)가 지난 2일(현지시각) 영국의 렉섬에서 렉섬AFC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잉글랜드 풋볼리그(EFL) 4부리그로 승격을 축하하는 버스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렉섬/로이터 연합뉴스

구단주들의 야심은 그보다 크다. 레이놀즈는 지난 1월 <이에스피엔>(ESPN)과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프리미어리그까지 가고 싶다.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을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쥐어짜서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했다. “이것이 5부 팀을 프리미어리그 팀처럼 홍보하고 운영했던 이유”라고 그는 덧붙인다. 실제 레이놀즈의 꿈에 가장 가까운 사례로는 2009년 4부에서 출발해 6년 만에 1부에 오른 본머스가 있다.

잉글랜드 하위 리그에는 미국인 ‘쩐주’를 둔 구단이 많다. 2∼4부 구단의 27%가 그렇고 내셔널리그에도 렉섬 말고 두 팀이 더 있다. 투자자들에게 영국의 작은 구단들은 역사와 전통, 공고한 지역 기반 서포터즈에 승격이라는 특급 레버리지까지 갖춘 매력적인 상품이다. 다만 누구나 이 투자를 낭만적인 서사로 포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렉섬의 ‘헐리우드 클래식’ 같은 이야기는 (레이놀즈, 맥일헨리와) 렉섬만 가능했던 길이다. 그들은 축구의 연옥에서 모두가 행복한 디즈니 월드를 만들어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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