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공 전략, 실용주의의 실종 [EDITOR's LETTER]

2023. 5. 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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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들이 전자 제품을 언박싱하는 동영상을 간혹 봅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눈을 피해 사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 유튜버들이 박스를 뜯고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깨알같이 써 있는 매뉴얼을 휙 던져 버리는 겁니다.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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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유튜버들이 전자 제품을 언박싱하는 동영상을 간혹 봅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눈을 피해 사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며 한국 유튜버들이 박스를 뜯고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깨알같이 써 있는 매뉴얼을 휙 던져 버리는 겁니다. “너 따위는 없어도 내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튜버만 그럴까요.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매뉴얼을 잘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자가 아니라 경험입니다. 한국의 모든 서비스가 빠르기로 유명한 것도 매뉴얼보다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데 집중한 결과일 것입니다. 매뉴얼 사회인 일본과 다른 점입니다. 동일본 대지진 때 일본에서는 구호 물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를 살펴보니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비대위를 결성해 스스로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한국인의 특성을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용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왕조가 500년을 갔다. 하지만 지금은 문화 유적 외에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새로운 한국인이 형성됐고 이들은 시대에 따라 적절하게 대상을 바꿔 가며 좋은 것을 선택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전략으로 택했다는 얘기입니다. 흔적은 곳곳에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에 전 국민이 나선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배고픔 속에도 자식들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친 것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선진국 기업들을 가장 빨리 따라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배를 사와 바다를 막아 조선 산업을 일으키고 일본 기술자들에게 배우기 위해 주말마다 셔틀 비행기를 띄웠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계적 기업을 키워 냈습니다.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해봤어?”라는 말에는 이런 실용주의에 기반한 도전 정신이 녹아 있습니다. 

 K팝의 성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K팝은 그 자체로 장르가 됐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K팝은 실용주의의 정점 그 자체입니다. 발라드, 랩, 댄스 뮤직은 물론 필요하면 클래식까지 뭐든 집어넣어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K팝에는 아무런 레거시가 없어 가능했겠지요. 

정치와 외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사회주의의 패망을 보고 북방 정책을 들고나옵니다. 대만과 하루아침에 외교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중국이라는 실리를 택했죠. 외환 위기 때는 이념에 상관없이 이헌재 같은 전문가를 등용해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 진영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합니다. 

종교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불교·유교와 함께 수천년을 살아온 나라가 수십 년 사이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5개를 보유하게 된 것도 실용주의 전략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국 사회는 경제·문화적으로 선진국이 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실용주의가 버려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념적으로 양분된 것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마찬가지입니다. 소모적 논쟁이 양산되고 있지요. 수명을 다한 노동법 개정을 두고 비현실적 대안만 난무합니다. 외교에서 실용주의의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최근 발표된 한국의 각종 경제 지표는 위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 여파가 아닐까 합니다. 세계화의 종말,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 독자적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한 T25(Transactional 25) 국가의 등장 등은 한국에 과거와 다른 복잡한 산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오늘을 만든 실용주의 노선이 가장 절박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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