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와인 산지 덮친 따뜻한 겨울, 메마른 봄…말라붙은 땅에 움트는 물 분쟁의 싹

박은하 기자 2023. 5.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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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피레에 조리앙탈 리버살트에서 4월 11일 촬영한 아글리강의 모습. 강바닥이 거의 드러나 있다.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프랑스에서 스위트 와인 산지로 이름난 남프랑스 피레네 조리앙탈의 작은 마을 리버살트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기차역 광장의 ‘텅 빈’ 분수대였다. 분수대는 마치 단 한 번도 물을 뿜어낸 적 없는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10여 분 정도 걸어가자 포도밭과 살구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아래 넘실거리며 흘러가고 있어야 할 아글리강은 바닥의 4분의 3가량이 드러나 있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 갈라질 조짐을 보이는 강바닥에 백황색 흙먼지가 날렸다. 물이 흐르는 대신 곳곳에 웅덩이처럼 고여 살짝 냄새가 났다. 지난해 8월 유럽에서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왔다며 외신들이 전한 풍경과 흡사했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은 지난달 11일(현지시간) . 이제 불과 4월이었다.

“저 다리를 보세요. 원래는 다리 기둥이 잠기도록 물이 차 있어야 합니다. 9개월 동안 비가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마을 주민 다비드(43)에 따르면 강의 수위는 평년보다 2m 이상 낮아졌다. 다비드는 “재앙적 상황”이라며 “올여름이 벌써 두렵다”고 말했다.

리버살트 주민 다비드가 올봄 겪은 극심한 가뭄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피레네산맥 기슭에서 동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있는 피레네 조리앙탈 저지대는 프랑스의 대표적 스위트 와인 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산맥에서 발원한 계곡과 강을 따라 펼쳐진 과수원에서는 포도 외에도 살구, 체리, 복숭아 재배가 활발히 이뤄진다. 리버살트는 지역 이름을 딴 와인이 있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험준한 산과 계곡, 강, 과수원 등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이 자랑인 지역이지만 올해는 한 계절 일찍 찾아온 ‘재앙적 가뭄’의 상징이 됐다.

에스피라 드 라글리에서 촬영한 4월 11일 아글리강 상류의 모습.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버스를 타고 약 40분 동안 거슬러 올라간 아글리강 상류 지역의 또 다른 마을도 상황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산지라 기온은 서늘했지만 수위는 대폭 낮아져 있었다. 물기라고는 없이 바싹 마른 밭에서 묘목들이 힘겹게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농민들은 지하수가 다 말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겨울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가 유럽의 안보를 뒤흔들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정작 유럽이 마주한 위기는 난방 부족으로 인한 ‘추위’가 아닌, 겨울철 이상고온 현상이었다. 유럽 곳곳에서 1월 최고 기온이 경신됐다. 스위스의 한겨울 최고 기온이 20도를 넘어선 적도 있었다. 알프스와 피레네의 고산지대에서 눈이 녹아 스키장이 문을 닫았다.

이상고온이 지속하자 난방 수요가 줄면서 가스 가격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따뜻한 겨울로 인해 에너지 위기를 넘겼다며 안도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바닥을 드러낸 강과 바짝 마른 포도밭은 더 섬뜩한 위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프랑스 에스피라 드 라글리에서 촬영한 포도밭. 피레네산맥에서 발원한 계곡과 강을 따라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기상관측소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12개월 동안 피레네 조리앙탈의 주도 페르피냥의 강수량은 197㎜에 불과했다. 페르피냥의 연간 평년 강수량은 557㎜다. 사하라 사막의 강수량이 연간 50~100㎜, 북미와 호주 북부 사막의 강수량은 250㎜를 밑돈다. 사막 수준으로 비가 온 것이다. 문제는 올해만 벌어진 예외적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파비안 보네 피레네 조리앙탈 농업회의소장은 “살구, 포도, 원예, 어업 등 이 지역에서 해왔던 모든 유형의 생산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할지 궁금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뭄에 시달리는 에스피라 드 라글리의 한 포도밭. 흙이 바싹 말라서 딱딱했다.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리버살트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2~13일 비가 내렸다. 해갈에는 턱없는 강수량이라 안도하는 목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피레네 조리앙탈 당국은 지하수 고갈이 너무 심각하다며 상수원이 있는 지역인 바 콩플랑 계곡 인근 마을 4곳의 급수를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약 3000명의 주민들에게 생수가 제공됐다. 지역 주민 미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물을 갖고 있었고 생수를 살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가뭄의 피해는 파리에서 느끼기 어려웠지만 계곡 주민들에게는 직격탄이었다.

비가 멈춘 14일 오전 페르피냥에서 테강 상류 뱅사 댐으로 향하는 기차가 운영을 중단했다. 농민 300여명이 이날 오전 7시30분부터 트랙터 150대를 동원해 고속도로와 기차길목 곳곳을 점거했기 때문이다. 가뭄이 극심해지면서 당국이 뱅사 댐 물 사용을 제한하자 농민들이 결사적인 투쟁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피레네 조리앙탈 당국은 여름철을 앞두고 더욱 강한 물 사용 제한 조치를 내놓았다. 오는 10일부터는 수영장·골프장·세차장 물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고, 농업용 관개수로 및 지하수 개발 역시 당국과 협의해야만 한다.

피레네 조리앙탈 지역의 농민들이 정부의 가뭄 대책에 항의하며 지난 4월 14일 페르피냥에서 뱅사 댐으로 가는 길목을 흙을 쏟아 막고 있다./AFP연합뉴스

가뭄으로 인한 문제는 경제적 피해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명을 직접 위협한다. 17일 피레네 조리앙탈의세르베르에서는 올해 첫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다. 930㏊의 면적이 하루 만에 불에 탔다. 역대 최악이라는 지난해보다도 더 빨리, 더 큰 규모로 찾아온 산불이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부 장관은 이튿날 현장을 찾아 “생태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가뭄은 농촌 흙집 붕괴사고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가뭄으로 바싹 마른 흙벽이 갈라지면서 집이 무너져 내리는 현상이다. 리버살트에서도 벽이 갈라진 집들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리버살트에서 본 벽이 갈라지고 칠이 떨어져나가는 집.

물을 둘러싼 분쟁은 지역사회마저 분열시킨다. 가뜩이나 물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주민들이 이웃이 물을 과소비한다며 당국에 신고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농가는 관광객들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면서 관광업계에 항의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피레네 조리앙탈 지역에는 145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말라붙은 땅에서는 정치적 분노와 갈등, 분쟁의 조짐이 싹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기후변화의 타격을 먼저 얻어맞은 북·동부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어나던 일들이 점점 북상하고 있었다. 유럽의 따뜻한 겨울과 메마른 봄의 풍경은 ‘에너지 위기’보다 더 풀기 어려운 숙제를 안겨줬다.

페르피냥에서 뱅사 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일레쉬르터 기차역에서 만난 쥐앵(70)은 1999년부터 그린피스를 후원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원전 핵 물질 유출 사고 등 거대 과학기술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비가 아예 오지 않아 물이 말라버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물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이고, 그 물을 먹어야만 자랄 수 있는 과일과 와인 역시 우리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 즐기는 것들이다. 쥐앵은 “모두가 책임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페르피냥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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