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들어와” 피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이 그녀에게 말했다
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76쪽 | 1만5000원
어떤 기억은 서랍 바닥에 깔려 있는 사진과 같다. 빛바래고 눅눅해진 채로 그곳에 있다는 걸 아는데, 꺼내볼 엄두가 나지 않는 사진.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서 ‘정원’의 죽음이 그렇다. ‘나’(준희)는 그의 20주기를 맞아 추모 모임에 나간다. 정원과 함께 하숙집에 살며 대학 시절을 보낸 ‘부영’과 ‘경애’가 모임에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연락을 보낸다. 예상대로다. 정원이 죽고, 경애와 부영이 틀어지며 친구 관계가 끝났다. ‘나’는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를 끝없이 반문하며 과거를 회상한다.
‘나’의 발걸음은 30년 전 넷이 함께 떠난 강촌 여행에 멈춰선다.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당시 정원은 친구들 만류에도 교직을 관두고 연극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숙소에서 사슴벌레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어디로 들어오는 거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비범하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 말이 소설을 쓰고 싶은 나와 연극을 하고 싶은 정원의 가슴에 박힌다. 불투명한 미래의 벽에 막힌 이들에게, 자유를 느끼게 해준 것이다.
연극 무대에 오르던 정원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활고, 우울증…추측만 있을 뿐, 이유는 불분명하다. ‘나’는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말을 계속 떠올리다 속뜻을 깨닫는다. 자유가 아닌, 어떤 잔인한 운명이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가 그 말에 담겨 있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쓴 권여선의 7번째 소설집이다. 단편들은 서랍 바닥의 사진을 마주하고, 그곳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힘을 읽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가 책에 수록된 편지에 쓴 구절이 맴돈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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