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 번 열리는 초록빛 대전… 茶전쟁이 시작됐다[수토기행]

글·사진=안영배 기자·철학박사 2023. 5. 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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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차의 본향, 하동군
지리산 자락 온통 초록빛깔로 덮여… 올해 해차, ‘하동 차쟁이’ 사이 호평
국내 최대 규모 ‘하동세계차엑스포’… 7왕자 기념 사찰 ‘칠불사’도 볼거리
차와 문학의 만남 ‘토지문학제’ 열려… ‘베어빌리지’서 반달곰 재롱 볼 수도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차밭.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동 야생차밭은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지리산 남쪽 자락의 경남 하동이 차(茶) 축제로 야단법석이다. ‘2023 하동 세계 차 엑스포’가 한 달간(5월 4일∼6월 3일) 열리는 가운데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 일대에서는 ‘천년의 차, 천년의 문학’을 주제로 토지문학제가 개최된다. 차 문화와 인연 깊은 칠불사에서는 성불(成佛)한 가야 7왕자를 비롯해 김수로왕과 허왕후 가족을 묘사한 ‘칠불괘불탱화’ 점안식도 공개된다.》

섬진강변 화개장터로 유명한 하동군의 지리산 자락은 지금 온통 초록빛깔로 덮여 있다. 화개동천의 깊은 골짜기, 경사진 산등성이를 따라 펼쳐지는 야생차밭 때문이다. 뭉텅뭉텅 구름 모양으로 자란 야생 차나무는 목가적이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하동은 ‘야생차의 본향(本鄕)’이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한 동네다. 우리 역사 기록도 차 문화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린다. ‘삼국사기’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왔는데, 왕이 지리산에 이를 심게 했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소수 특권층에서만 향유되던 차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

‘삼국사기’가 전했던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 자락의 차 문화는 이후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대일항쟁기에 차 개량종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도 ‘하동 차쟁이’들은 토종 야생차만 고집해 왔다. 그렇게 잘 보존돼온 야생차는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4월 말 하동을 찾았을 때, 오랜 차 역사를 가진 고장답게 곳곳에서 진한 다향(茶香)을 느낄 수 있었다. 1년에 단 한 차례 치른 ‘차대전(茶大戰)’의 여운이기도 했다. 개인 야생차밭을 운영하고 있는 하동의 차쟁이들은 매년 곡우(4월 20일) 이전에 따는 우전차를 시작으로 세작(細雀·어린 찻잎으로 만든 차) 품평을 하며 한 해 차 농사를 승부짓는다. 품평회 참여자는 지리산 곳곳 전통 사찰의 스님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다인(茶人)들이다. 물론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감지한 차의 향과 맛은 입소문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에 차 판매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덖음 도사’로 유명한 다우제다의 이승관 대표.
흥미로운 건 하동 차쟁이들 사이에서 올해 해차가 유달리 뛰어나다고 자평한다는 점이다. 다우제다(다우찻집)의 이승관 대표는 “33년 전 녹차에 매료돼 직장을 때려치우고 하동 화개에 들어왔을 때 맛본 차맛을 올해 드디어 찾아냈다”며 감격했다. 이 대표는 차의 품질을 결정짓는 데 절대적인 기술인 ‘전통 덖음’의 달인으로 통한다. 350∼400도의 가마솥에서 오직 면장갑을 낀 양손만을 사용해 어린 잎을 덖어내는 방법인데, 자칫 가마솥에 손을 데기가 십상인 고난도 기술이다. 이렇게 손만 사용해서 적절한 시간을 맞추어 찻잎을 덖어내야만 차맛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게 3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배운 이 대표의 지론이다.

“올해 우전차에서 야생차 본연의 참맛을 찾았다. 밤나무 냄새 비슷한 율향(栗香), 떡에서 나는 콩고물향, 어린아이의 배냇향 정도만 나와도 상급 차로 치는데 올해 차에서는 그 윗단계인 청향(淸香)과 난향(蘭香)까지 나왔다.”

‘청향’은 몸과 마음이 맑아지면서 환희심이 생기고 양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차맛이다. 난향 역시 향이 있는 듯 없는 듯 차원이 다른 경지를 맛보게 하는데, 단전 밑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가슴을 뻥 뚫고 머리 위로 뻗어가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게 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난향과 청향은 신선급이 마시는 귀한 차로 대접받는다. 지리산 자락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대표는 이런 차향이 지리산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차 문화와 가야 불교의 산실

지금 하동에서는 지리산 차쟁이들이 우려낸 차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2023 하동 세계 차 엑스포’가 그것이다. 코로나19로 연기됐다가 올해 열린 국내 최대 규모의 이 엑스포는 하동스포츠파크와 하동야생차박물관, 하동 야생차마을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하동 차 농사꾼들의 솜씨가 담긴 여러 종류의 야생차 제품은 물론이고 차 관련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담은 콘텐츠, 차 문화의 기원과 전승 과정, 차 관련 도구와 공예품 등을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편으로 ‘자연의 향기, 건강한 미래, 차’라는 모토에 맞추어 세계 5개국 명차를 마셔 보는 ‘찻잔 들고 세계여행’, 야생차밭에서 차와 함께 캠핑을 즐길 수 있는 ‘티 캠핑’, 다원과 야생차밭을 거니는 ‘천년다향 힐링길’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하동 지리산 자락의 비경과 차향을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힐링길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하동 차나무 시배지에서 출발해 북상하거나 남하하는 두 코스로 준비돼 있다. 북상 코스는 시배지에서 출발해 쌍계초등학교∼목압마을∼조태연가∼모암마을∼만수제다 전통차밭∼관아다원 전통차밭으로 이어지는 4km 거리이고, 남하 코스는 시배지에서 출발해 혜림농원∼신촌마을차밭·도심다원∼유로제다∼정금차밭∼차유통센터로 이어지는 4km 거리다. 차밭을 걷다가 하동 명품 해차를 직접 맛보고 싶으면 다원에 들러 다담(茶談·티토크)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주인이 내주는 해차를 마시며 차와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칠불사의 칠불괘불탱화에는 성불한 가야 7왕자와 김수로왕 부부 등이 묘사돼 있다.
우리 차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다면 야생차마을에서 산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한 칠불사를 찾아가 볼 일이다. 칠불사는 가락국(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이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7왕자를 기념하여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하동 차쟁이들은 일곱 왕자가 칠불사에서 수도를 할 때 그 어머니인 허왕후가 이곳으로 찾아와 차를 공양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얘기(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도 그 근거로 들이댄다.

굳이 허왕후와 7왕자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칠불사는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 차 문화의 중흥조로 받들어지는 초의선사가 이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동안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했기 때문이다. 칠불사는 한국 다도사에 있어서 중요한 현장이다.

마침 칠불사에서는 7일 오후 1시 ‘칠불괘불탱화’ 점안식이 열릴 예정이다. ‘일곱 부처님 나투시다’라는 이름의 칠불괘불탱화 점안식은 지리산 7불(가야 7왕자)이 역사상 처음으로 모셔지는 행사다. 3년여에 걸쳐 완성된 탱화에는 가야의 건국 스토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리산 칠불’이 중앙에 묘사돼 있고, 작품 상단 오른쪽에는 가야 건국주인 김수로왕과 허왕후, 장유선사(허왕후의 오빠)가, 왼쪽에는 가야 제2대 왕인 거등태자 및 허씨 성을 이어받은 2명의 왕자가 묘사돼 있다. 그러니까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난 가족 그림인 셈이다.

칠불괘불탱화 조성 주역인 칠불사 주지 도응 스님은 “지리산에서 득도한 7부처를 기려 지어진 칠불사에서 처음으로 일곱 부처를 모시게 돼 마침내 절 이름값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점안식을 미루다가 마침 하동 차 엑스포가 열리는 때에 점안식을 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 지리산의 모녀 반달곰

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 바로 인근에 박경리문학관도 있다.
차와 문학이 함께 어우러지는 ‘2023 토지문학제’(5∼7일)도 놓치기에는 아쉽다. 이 행사는 박경리문학관과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악양면 평사리) 일대에서 진행된다. 최참판댁은 소설에 등장하는 묘사를 따라 재현해낸 고택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옛 양반가의 전형적인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이곳은 한옥 고택 장면 촬영을 위해 방송국과 영화 제작사가 자주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자락 의신마을 베어빌리지의 반달곰. 마을 주민들이 모녀 반달곰을 돌보고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라면 지리산에 사는 반달곰을 만나볼 일이다. 의신마을의 베어빌리지라는 생태학습장이다. 야생에서 적응하지 못한 반달곰을 마을 주민들이 거두어 키우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엄마 반달곰인 ‘산이’와 그 딸인 ‘강이’가 살고 있다. 마을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공중 통로에서 간식을 던져주며 반달곰의 재롱을 볼 수 있다. 하루 2회 40분씩 개방하고 예약자에 한해 한 회당 30명만 관람할 수 있어 미리 확인해야 한다. 의신마을에서는 캠핑과 숙박이 가능하다. 펜션과 민박형 숙소 등 다양한데, 차 엑스포와 함께 묶어 여행하기에도 좋다.

글·사진=안영배 기자·철학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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