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보기 전에 아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돼’
사람도 예술도 매한가지
“그림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가 있다. … 그림을 아는 자는 그림의 형식과 화법은 차치하고, 먼저 심오한 이치와 오묘한 만듦새 속에서 뭔가 깨닫는다. 그림 감상의 핵심은 보는 일, 사랑하는 일, 모으는 일의 허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는 데 있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모아도 그저 모으기만 하는 게 아니다(畵有知之者, 有愛之者, 有看之者, 有畜之者 … 知之者, 形器法度且置之, 先會神於奧理冥造之中. 故妙不在三者之皮粕, 而在乎知.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 而非徒畜也). —’석농화원발’(유한준·1732~1811)
소개팅 상대와 빨리 헤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상대 말을 끊고 이렇게 말해보라. “잠시만요, 당신에게 천천히 육욕(肉慾)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놀란 상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신종 변태인가. 마음속에서 비상벨이 울린다. 도망쳐! 이제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데이트 상대에게 느닷없이 육욕 운운한 것이 물론 문제겠지.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른바 플라토닉 러브만 하기 위해 데이트하는 사람은 소수다. 데이트에는 대개 성애(性愛)가 따른다. 상대에게 얼마나 성적으로 끌리느냐가 초기 데이트의 관건이다. 상대에게 말과 몸짓으로 호감을 전하다가, 피부의 접촉을 거쳐, 결국 점막이 부딪치고, 마침내 체액을 교환하는 것이 포유류 데이트의 흔한 전개 아니던가. 그러니 데이트 상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진정 변태스러운 것은 육욕이 “느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발언이다. 욕망이 배구의 시간차 공격인가. 축구의 공 돌리기인가. 야구의 지연작전인가. 어떻게 육욕이 천천히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육욕을 아예 안 느끼면 몰라도, 느낄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던가. 육욕을 느리게 느낀다는 것은 통증이나 단맛을 느리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기이하다.
펄펄 끓는 물에 손이 닿았을 때, 앗 뜨거! 이렇게 순간적인 통증을 느끼지, 느리게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딸기 케이크를 입에 넣었을 때, 달콤하다! 이렇게 쾌감을 느끼지, 느리게 쾌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끓는 물에 손이 닿았을 때, 아아… 피부가… 천천히… 아… 프… 다, 하며 천천히 손을 빼는 사람이 있을까. 케이크를 입에 넣고, 아아… 혀… 가… 느리게… 단맛을… 느끼고 있어, 신음할 사람이 있을까.
욕망은 펄펄 끓는 물이거나 녹아내리는 케이크다. 혹은 둘 다이거나. 욕망은 논리적 계산이 아니라 감각적 체험이다. 감각적 체험은 논리적 계산보다 빠르다. 일단 어떤 감각적 체험이 먼저 발생하고, 그 감각의 원인이나 의미는 나중에 가서 드러난다. 그래서 일본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나날의 봄’이란 소설에서 매혹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누군가를 천천히 좋아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을 천천히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천천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역시 불가능한 것 같다.” 소개팅 상대의 골격, 눈썹의 길이, 쇄골의 각도, 팔다리의 비율, 콧날의 각도를 계산한 뒤에야 비로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비율이 정확히 맞군요. 지금부터 저는 당신에게 육욕을 느낄 준비가 갖춰졌어요.”
물성을 가진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에 대한 호오는 대개 보는 즉시 결정된다. 그래서 첫 대면의 감각이 중요하다. 좋은가, 마음속에 파도가 이는가, 탄성이 절로 나오는가, 감각이 전하는 파동을 충분히 느낀 뒤에, 천천히 자문해 보는 거다. 왜 좋았지? 혹은 왜 별로였지? 자신의 감각적 체험을 설명해보려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애초에 자기 감각에 충실하지 않으면 설명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품 해설 같은 것을 먼저 읽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의 자연스러운 발생을 억압하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아니, 그러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뭐지. 뭔가를 보기 위해서는 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던데? 옛 그림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 발문에서 유한준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림 감상의 핵심은 보는 일, 사랑하는 일, 모으는 일의 허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는 데 있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
유한준이 말한 앎과는 좀 다르지만, 일정한 지식이 중요할 때도 물론 있다. 서양 종교화의 상당 부분은 순교 성인을 묘사한 것이다. 문맹자들도 쉽게 그림 내용을 알아보도록, 각 순교 성인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 발달했다. 이를테면 석쇠를 들고 있는 남자는 뜨거운 석쇠 위에서 고문을 받은 성 라우렌시오이고, 살가죽을 들고 서 있는 성인은 껍질이 벗겨지는 고문 끝에 순교했다는 성 바르톨로메오다.
문맹자들을 위해 발달한 이 상징들이 이제는 박사 학위를 서너 개 가진 사람도 따로 배우지 않으면 모를 수수께끼가 되었다는 것이 서양 회화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상징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미술관에서 명화를 마주쳐도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적절하다. 종교화를 심도 있게 감상하려면 사전에 뭔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기 전에 아는 것이 매번 능사는 아니다. 완벽한 작품 해설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볼 수도 없다. 안다는 것은 결국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도리 없이 선입견을 갖는다는 것이다. 선입견은 작품 감상을 오히려 제약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의 지식을 얻었다면 작품과 일단 한번 대면해 보는 거다. 자신의 감각에 충분한 기회를 주어 보는 거다. 감각이 강렬하게 반응해 오면 그때 관련 지식을 본격적으로 습득해도 늦지 않다.
좋아하는 일은 대개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어떤 이의 잔상은 시간이 지나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잔상이 오래 남는 그에게 다시 만나자고 문자라도 남겨볼까. 자, 이제 말초적 감각을 넘어선 진짜 연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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