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통밀빵은 힘이 세다
딩동―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출판사 대표 Y다. 약속해놓고 마감을 넘긴 원고가 있다. 뜨끔했다. 재촉하는 문자로구나. 그런데 웬걸. 뜬금없이 빵집에 빵이 쌓인 풍경을 보내왔다. “통밀빵을 보니 작가님 생각이 나서요.” 내용이 이어졌다. “댁에도 좀 보내드렸어요. 건강 챙기면서 일하세요. 파이팅!” 이 얼마나 다정한 압박인가.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는 경우가 있다. 어느 기업에서 사보(社報) 편집을 담당하는 K가 보낸 커피 쿠폰도 그랬다. 그 매체에 2년간 기고하다 얼마 전 종료했다. 이젠 연재도 끝났겠다, 더 이상 연락이 오갈 사이가 아니다. “그동안 커피 한잔 대접하지 못했네요. 제 작은 성의입니다.” 생각해보니 K랑은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다. 문명 세계가 만든, 이런 오묘한 관계가 숱하다. 오래 연락하고 이메일과 메신저로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인데 거리에서 만나면 얼굴조차 모를 사이. 그럼에도 관계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소소한 다정함에 때로 뭉클해진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선물 주세요’라는 은근한 종용이거나 엉큼한 자랑밖에 되지 않지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자랑 열전을 이어보자면, 지난 몇 년간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우리 편의점에서 일했던 알바가 케이크를 들고 찾아온 사건이다. 그것도 느닷없이 스승의 날에. “웬 케이크?” 하고 물으니 “사장님이 제 스승님이잖아요” 하면서 씨익 웃었다. 그런 와중에도 ‘얘가 어떤 회사에 들어갔다더니 나한테 무슨 계약서를 들이미는 것 아니야?’ 하고 경계심을 가졌으니, 나는 역시 속물인가 보다. 그는 지금은 시내버스를 운전한다.
조금의 의심이나 경계 없이 받는 선물도 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인근 카페 주인장이 내 선물까지 챙겨와 감동했던 적이 있고, 우리 편의점 꼬마 손님이 삐뚤빼뚤 적어 건넨 “마트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손편지는 지금도 계산대 한쪽에 붙여 놓고 용기를 북돋는 부적으로 삼는다. 신간 도서가 나왔다고 책을 보내면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라는 담당 편집자의 포스트잇 한 장도 선물이라 할 것이고, 1+1 상품을 구입하고는 계산대 위에 하나를 조용히 올려놓고 나가는 단골 손님의 잔잔한 미소도 오래된 선물이다. 비타민 음료 한 병으로 하루가 꽉 찬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요 가정의 달이라는데, 그런다고 편의점이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다. 주택가 편의점은 어린이날 반짝 특수를 누리겠지만 그렇다고 매출이 훌쩍 뛰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관광지 편의점 정도나 계절의 혜택을 받는다. ‘빨간 날’이 많은 데다 대체공휴일까지 생겨나 오피스 상권 편의점 점주로서는 시름만 깊어갈 뿐. 그렇다고 한숨만 내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5월이 지나면 편의점의 대목인 여름이다. 계절이 윤회하는 법칙을 떠올리며 의연히 오늘을 지킨다. 가게 안팎 청소하고, 망가진 곳이 있으면 수리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면서.
그러고 보니 5월은 왜 가족의 달이 아니라 ‘가정’의 달일까. 가족과 가정의 차이는 뭘까. 사전에 따르면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 입양 등으로 맺어진 관계이고, 가정은 그보다 넓은 개념이란다.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유권자의 날… 같은 뜰[庭] 안에 사는 사람이면 나의 가정이랄까.
코로나19가 많은 것을 달라지게 했지만 그중 하나는 만만한 ‘핑곗거리’를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을 핑계,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핑계, 가리고 싶었던 것을 가릴 수 있게 만든 핑계…. “코로나19 때문”이라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을 멀어지게 만든 핑계가 되었다. 그것을 이른바 ‘뉴노멀’이라 부르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젠 하나둘 노멀로 되돌려야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노멀은 ‘뜰 안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드라운 연대의 마음 아닐까.
Y대표가 보낸 통밀빵이 도착했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 쪽지에 적었다. “꼭꼭 씹을수록 맛있더라고요. 자연의 숨소리 느끼면서 충분한 물과 함께 드세요.” 치즈가 들어있는 통밀빵을 꼭꼭 씹어 오물거리던 아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 이거… 답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면 덜컥 겁부터 나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웃끼리 나누는 따뜻한 마음까지 멀리할 수는 없으리라. 5월에 나는 누구의 고군분투를 응원하고 누구와의 소원함에 먼저 통밀빵을 건네야 할까 헤아려보았다. 받기만 하고 주진 않으며 살아왔다. 내가 과연 ‘줘야’ 할 것들에 대해 돌아보았다. 긴 슬럼프를 지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Y대표님, 원고는 최대한(!) 빨리 쓸게요. 맛있는 빵, 잘 먹었습니다. 어떤 선물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통밀빵은 과연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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