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레터] 인생도 마일리지?
기자 초년 시절, ‘물’을 먹거나 꾸지람을 듣고 뿌루퉁해 있을 때면 선배들이 말했다. 욕먹는 것도 월급에 다 포함돼 있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지시를 받거나 불편한 식사 자리에 호출될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부산물이겠거니 했다.
박은빈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역할을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그만한 신드롬은 없었을 것이다. 박은빈은 수상 소감에서 “세상이 달라지는 데 한몫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시청자들이) 적어도 이전보다 친절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있기를, 또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다름이 아닌 다채로움으로 인식하길 바라며 연기했다”고 말했다. 우영우의 인기는 행운이나 로또가 아니다. 아역 시절부터 25년 넘게 시행착오와 경험, 집념을 축적한 결과다. 이럴 때 “적금 탔다”고 표현한다.
연극 ‘날 보러 와요’(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의 배우 이대연이 들려준 일화가 떠오른다. 그는 두 시간짜리 연극에 10분만 나왔는데 1996년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심사를 맡았던 극작가 차범석에게 세배를 하러 가서 “어떻게 작은 역할을 맡은 배우에게 상을 주셨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네가 그동안 해온 게 있으니까.” 이대연은 “누적 마일리지 같은 게 있더라”며 껄껄 웃었다.
마일리지의 끝판왕은 올해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김재건(76)이다. 배우 인생 50년 만에 국내 최고의 연극상이 그를 호명한 것이다. 심사위원장 말마따나 김재건은 스타였던 적도, 전성기도 없었다. 그러나 배역이 크든 작든 제 몫을 하며 마라토너처럼 꾸준히 달려왔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양자경도 매한가지다. 환갑에 할리우드 유리천장을 깬 이 배우는 말했다. “큰 꿈을 꾸세요. 그 꿈이 실현된다는 걸 (이렇게)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성 여러분,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은 절대 믿지 마세요!” 인생도 마일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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