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치’ 홈디자인 급성장…집에서 만나는 ‘궁극의 럭셔리’

2023. 5. 6.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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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디자인 위크
루이 비통의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 전시 공간 중 하나. 네덜란드 출신 산업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스가 챙이 넓은 여성의 모자에서 착안한 ‘카펠린 램프(Capeline Lamp)’의 유려한 곡선이 돋보인다.
매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만큼은 패션이 ‘옷’을 벗는다. 유수의 패션 하우스들이 세계 최대 디자인 행사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 Design Week)’에 참여하면서다. 매년 2월과 9월, 계절에 앞서 신규 의상을 공개하는 패션위크와 달리 이 행사에선 가구·조명·가정용품 등으로 장르를 넓힌 ‘인테리어 런웨이’를 펼친다.

이처럼 패션을 끌어당기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매력은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1961년 가구 박람회(살로네 델 모빌레, Salone del Mobile)로 시작한 행사가 이제 디자인 전반을 아우르는 축제가 되면서 메인 전시장을 넘어 도시 곳곳에서 전시·팝업·프레젠테이션·파티가 열린다. 팬데믹 이전에 이미 참여 업체만 2500여 곳인데다 올해 관람객은 33만 명으로 패션위크의 7배 수준에 달했다.

지난달 17일부터 23일까지 열린 2023 밀라노 디자인 위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패션 브랜드들의 적극성이 눈에 띄었다. 참여 브랜드가 30여 개로 늘었고, 에르메스·루이 비통·디올 등 이미 오래 전부터 행사에 함께한 패션 하우스 외 신규 브랜드들이 독창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관람객 33만명, 패션위크의 7배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의 프로젝트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건 브랜드의 정수를 고수한다는 것. 전시 콘텐트는 달라도 각자 핵심으로 삼는 디자인·기술력·스토리·철학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예를 들어 로에베는 ‘로에베 의자들’라는 이름의 전시에서 브랜드의 DNA인 ‘직조’를 내세웠다. 각기 다른 소재를 직조해 리디자인한 30개의 스틱 의자를 선보였는데(22개의 빈티지 의자+새로 제작한 의자 8개),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종이·라피아·담요·단열호일·펠트 등을 적용해 로에베의 공예에 대한 애정과 장인 정신이 강하게 전달되는 매개체가 됐다.

디올 역시 브랜드의 자산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메종을 상징해 온 ‘메달리온 의자’에서 영감을 받아 ‘미스 디올 암체어’를 선보인 후, 올해는 또 다시 ‘무슈 디올’이라는 이름의 의자를 내놓으며 시리즈를 확장시켰다. 두 작업은 모두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과의 협업. 현장은 자칫 단출해 보일 수 있는 콘텐트를 웅장한 ‘쇼’로 보완했다. 어두워진 공간에 들어서자 LED 스크린으로 덮인 반원형 벽을 배경으로 수십 개의 의자가 끈에 매달려 새떼처럼 위아래로 펄럭이는 ‘군무’를 선보였다.

에르메스가 선보인 캐시미어 담요
에르메스도 ‘승마’의 유산을 이어갔다. 전시 전반에 걸쳐 예년과 달리 화려하고 과장된 요소를 자제하는 대신 ‘본질이 힘’이라는 타이틀답게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러그·소파·식기 등 홈 컬렉션을 두루 다뤘다. 그러면서도 말 머리가 그려진 도자기 식기, 말에서 영감을 얻은 러그 패턴 등을 통해 브랜드의 뿌리를 곳곳에서 드러냈다.

디자인 창의성을 극적인 공간 연출이나 설치 작품으로 알린 것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었다. 세르벨로니 궁전에서 열린 루이 비통 전시가 대표적. 브랜드가 2012년부터 시작한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Objets Nomades Collection, 여행에서 영감을 받은 가구·가정용품을 선보이는 디자이너 협업)’이나 루이 비통의 트렁크를 진열장으로 탈바꿈 시킨 디자이너 마크 뉴슨과의 협업도 눈길을 끌었지만, 올해 행사 내내 인스타그램을 도배한 건 따로 있었다. 궁전 안뜰에 들어서는 순간 시선을 압도하는 1만6000장 알루미늄 조각의 거대 설치물. 이는 건축가 마크 포네스가 구근 형태의 산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디올이 디자이너 필립 스탁과 협업해 제작한 ‘무슈 디올 암체어’.
보테가 베네타 역시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연일 긴 대기 줄을 만들었다. 지난 봄 패션쇼 무대 세트를 협업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스와 또 다시 만나 플래그십 매장 전체를 채운 설치 작품을 완성했다. ‘와서 보라(Vieni a Vedere)’는 제목의 전시는 흰색 천으로 구불구불한 형태를 만들고 나무 조각품과 그림을 더해 마치 동굴 같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였다.

로로피아나의 경우 아르헨티나 출신의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모하디드와 함께한 가구 시리즈 ‘아파체타(Apacheta, 돌탑)’ 컬렉션을 공개하면서 실제 돌탑 모양의 조각 설치물을 선보였다. 고급 원단으로 정평이 난 로로피아나답게 이전 가구 컬렉션의 원단 조각으로 제작하며 브랜드와의 연결성을 더했다.

한편 이번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는 현재보다 영역을 확장하려는 도전도 이어졌다. 가장 손꼽힐 만한 브랜드는 마르니로 식기 컬렉션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벨기에 인테리어 디자인 브랜드 세락스와 협업한 120피스의 도자기 세트 ‘한밤의 꽃들’은 다양한 꽃 모티프의 디자인을 마르니 특유의 경쾌한 색깔로 풀어냈다. 벽지로 유명한 기업 런던아트와 협업한 작품들은 마르니가 지금까지 의류에서 보여 온 고유 패턴을 재구성해 보여줬다.

MZ세대 중심 명품 소비 대중화

로에베가 ‘직조’라는 브랜드 DNA를 녹여 선보인 ‘로이드 룸 체어’.
이미 ‘카사(CASA)’ 홈 컬렉션을 보유 중인 아르마니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아웃도어 아이템을 공개했다. 유서 깊은 건물이자 브랜드 본사인 팔라조 오르시니를 처음으로 개방했고, 한적한 정원에 배치한 소파·식탁·테이블 등 야외용 가구가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럭셔리 패션 하우스가 디자인 행사에 함께하며 라이프스타일로 영역을 넓히는 건 이미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그 속도와 규모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이유가 뭘까.

에르메스가 선보인 테이블웨어.
무엇보다 팬데믹 이후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다양한 경험과 향유를 지칭하는 ‘라이프스타일’ 분야의 경우 팬데믹 이후 4조3000억 달러(5697조원)까지 성장이 예측된다. ‘홈디자인’ 시장만 해도 6억4300만 달러로 급성장 중이다(8516억원, 2023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 발표). 코로나로 인해 집이 더 이상 안전을 위한 피난처가 아니라 쉼과 일터 혹은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다기능적 공간이 되면서다.

특히 럭셔리 패션의 경우 홈디자인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다시 끌어당기는 유인 요소로도 한몫하고 있다. 글로벌 패션 전문 매체 비즈니스오브패션(BOF)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영국·프랑스의 부유층 소비자의 약 70%는 이미 구입한 브랜드의 가정용품을 구입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브랜드 정체성이 확고한 럭셔리의 경우 소비자가 옷으로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디자인을 식기·가구 등에 적용시키며 고객의 욕망을 해결하는 대안이 되기도 한다.

마르니가 올해 벨기에 인테리어 디자인 그룹과 협업해 처음 소개한 테이블웨어. [사진 각 브랜드]
럭셔리 패션의 성장은 곧 ‘희소성’과 반비례 한다. 많은 사람이 산다는 건 그만큼 독점력과 신비주의를 잃게 된다. 최근 명품 소비의 주축이 MZ세대로 낮아지고 리세일 마켓이 커지면서 럭셔리의 대중화는 불가피한 현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 홈 디자인 영역은 ‘조용한 사치’를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전은경 디자인 콘텐트 디렉터는 “집은 과시가 아닌 자신만의 색깔과 취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궁극의 럭셔리’ 혹은 또다시 차별화를 만드는 ‘울트라 럭셔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밀라노=이도은 자유기고가 leedoeun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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