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가 총애한 천청, 청렴했지만 군사 재능 평균 이하

2023. 5. 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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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4〉
웨이리황 통치 시절 동북 최대의 도시 선양(瀋陽)의 겨울 모습. [사진 김명호]
1950년 3월 14일, 홍콩 침사추이 국제여객선 부두는 평소와 달랐다. 새벽부터 한쪽 손을 포켓에 넣은, 눈매 매서운 청년들이 어슬렁거리며 오가는 사람들을 쏘아봤다. 현장에 있던 홍콩상보(香港商報) 기자가 훗날 구술을 남겼다. “간밤에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내일 오전 부두에 가보라는 말 남기고 툭 끊어버렸다. 속는 셈 치고 새벽부터 어디 가냐는 집사람의 신경질을 뒤로했다. 부두 주변이 살벌했다. 이상한 행동 했다간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그런 분위기였다. 흑색 승용차가 도착하자 청년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눈을 부라렸다. 차에서 내리는 50대 중반의 부부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항일 전쟁 시절 인도지나 주둔군 사령관과 한때 동북의 군·정을 총괄하던 국민당 2급상장 웨이리황(衛立煌·위립황)과 부인 한췐화(韓權華·한권화)가 분명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18분이었다. 두 사람이 배에 오르자 청년들도 흩어졌다. 지휘관 같은 사람이 내게 한쪽 눈 찡긋하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웨이의 최종 목적지가 베이징이라고 직감했다.”

천, 고향에 처 있었지만 혼인 수락

천청과 탄샹의 신혼 시절. 천청은 장인의 3불주의, 책임질 일 하지 않고, 간언(諫言)하지 않고, 죄짓지 말고를 죽는 날까지 준수했다.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동북은 두위밍(杜聿明·두율명), 천청(陳誠·진성), 웨이리황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두는 건강문제로 동북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천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총애가 두터웠다. 인간 세상이 모두 그런 것처럼 장과의 인연도 우연이었다. 황푸군관학교 견습 교관 시절, 외출에서 돌아온 천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에 의지해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읽다 보니 창밖에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체조로 몸을 풀었다. 산책 나온 교장 장제스는 다들 자는 시간에 유리창 안에서 어른거리는 청년이 누군지 궁금했다. 문에 손이 갔다. 교장을 본 천은 기겁했다. 팬티 바람으로 황급히 군례를 했다. 침상에 있는 국부의 저술을 본 장은 감동했다. 계속 근면하고 분투하라며 성명을 물었다. 말단 견습 교관의 운명이 희미한 새벽 햇살과 함께 비상하는 순간이었다.

장제스의 천청 총애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남들만큼 해도 칭찬이 잇달았다. 웬만한 실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길만한 곳에 내보내고 패할 것 같으면 보직을 바꿔줬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천청이 맘에 들었다. 국민정부 주석을 역임한 국민당 원로 탄옌카이(譚延闓·담연개)가 사윗감 구하자 천을 불렀다. “탄옌카이의 딸 탄샹(譚祥·담상)은 내 수양딸이다. 함께 가정을 꾸려라.” 고향에 처가 있던 천은 난감했지만 거절도 안 했다. 얼굴 붉히는 것으로 수락을 표했다. 조강지처는 미련함과 현명함이 뒤죽박죽인 여인이었다. 지혜로운 여자 소리 듣는 것에 만족했다. 비슷한 일이 많은 시절이었다.

웨이리황과 한췐화. [사진 김명호]
천청은 장점이 있었다. 엉망진창이던 관료사회에서 근엄하고 정직하고 청렴했다. 군사적 재능은 평균 이하였다. 탄샹과 결혼 직후 장시(江西)성의 중공 근거지 섬멸작전을 지휘했다. 결과가 형편없었다. 사단장 2명이 포로가 되는 등 참혹했다. 성 주석이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천청은 만고의 죄인이다. 당장 파면하고 죄를 물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온 천은 대문 닫아걸고 칩거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방문객도 만나지 않았다. 탄샹이 쑹메이링에게 달려갔다. “남편이 죽게 생겼다”며 통곡했다.

천청을 처벌하려던 장제스를 쑹메이링이 만류했다. “천청만큼 우리에게 충성할 사람이 누굴지 잘 생각해 봐라.” 장이 마음을 바꿨다. 천에게 다른 요직을 맡겼다. 항일 전쟁이 끝나자 더했다. 전공(戰功)이 없던 천에게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사령관을 겸직시켰다. 내전이 본격화 되자 천이 장을 안심시켰다. “3개월이면 관외(關外)의 공산비적들을 소멸시킬 수 있다. 관내도 3개월이면 족하다.”

중공, 때리면 때릴수록 몸집 커져

동북을 점령하고 화베이(華北)의 바이양덴(白洋淀)에 진출한 중공의 동북야전군. 바이양덴은 갈대가 우거진 섬이 도처에 널려있는 거대한 호수였다. 1941년 겨울, 갈대숲에 불을 지르는 전통 덕에 섬에 있던 일본군이 몰살했다. 주민들도 본의 아니게 항일투사로 이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현실은 천청의 예측과 달랐다. 중공은 때리면 때릴수록 몸집이 커졌다. 장제스는 난감했다. 천청에게 동북전구(戰區)를 직접 지휘하라고 지시했다. 천은 개혁을 좋아했다. 탄샹이 “개혁인지 뭔지 해 봤자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동북보안사령부’를 없애버리고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천은 전쟁보다 개혁과 대도시 고수에만 신경을 썼다. 군의 사기가 위축되자 불안했다. 탄샹에게 고충을 털어놨다.

탄샹이 수도 난징(南京)으로 날아갔다. 쑹메이링에게 하소연했다. “남편의 건강이 엉망이다. 전쟁터가 아닌 병상에서 죽는 것은 치욕이라며 한숨만 내쉰다. 웨이리황이라면 모를까 남편은 야전에 적합하지 않다.” 그날 밤 쑹을 통해 동북 얘기 듣던 장제스는 웨이리황을 거론하자 ‘아녀자들이 병(兵)을 논한다’며 발끈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날이 밝자 천을 웨이로 교체했다. 악수(惡手)도 이런 악수가 없었다.

장제스는 천청의 건강을 우려했다. 누가 들어도 자신의 귀를 의심할 보직을 줬다. “대만(臺灣)에 가라.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건강 회복하며 후속 지시 기다려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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