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늙어가는 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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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1)
얼마 전 ‘세상에 시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질문에는 시나 시인에 대한 회의나 불신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공격성도 찾을 수 없었고요.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 도서관에서 열린 문학 행사에 온 한 어린이의 물음이었습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실감 가는 답을 전하고 싶었던 까닭에 한동안 침묵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덥다, 배부르다, 저 옷 갖고 싶다. 등등. 하지만 또 이 세상에는 말로는 부족한 마음이 있습니다. 슬프다, 고맙다, 서운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이런 부족함을 채우고자 사람들은 말 대신 노래를 하고 시를 쓰는 것입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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